[칼럼] 안혜경 / 아트스페이스C대표

▲ 안혜경

눈송이처럼 떨어져 휘날리며 회색 빛 아스팔트를 하얗게 뒤덮는 벚꽃과 구불구불 돌담과 어우러진 노란 유채꽃, 뽀족뽀족 솟아나는 연록의 부드러운 아기 손 같은 잎! 봄빛으로 갈아 입은 4월이 참 눈부시다.

재래시장 근처 구도심으로 사무실을 옮기니 이 찬란한 빛을 눈과 입으로 즐기는 호사가 여간이 아니다. 이 따뜻한 봄에 들판을 가로지르며 뜯어낸 ‘꿩마늘(달래)’과 야들야들한 쑥, 동네 어귀 물통서 뜯어낸 미나리, ‘우영밭’서 잘라온 부추에 ‘앞바당’서 캐어온 뽀들뽀들한 미역, 캐내어 깨끗이 손질된 더덕까지. 시장 입구에 앉아 판매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정겨워 발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쪼그려 앉게 된다. 이제 곧 제주의 들판은 고사리를 캐려는 사람들로 북적일테고, 이 길엔 굵직굵직 먹음직한 날 고사리가 또 한자리 차지하게 될 것이다.

피터 멘젤이란 사진기자는 아내인 페이스 달뤼시오와 세계인들의 가정에서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열량의 식사를 하는지, 어떤 종류와 양의 식사 재료들을 구입하는지에 대해 취재하고 사진을 찍고 그 얘기들을 글로 써서 시리즈로 책을 발간해왔다. 20~30여개 국의 가정을 다니며 취재한 내용을 보고 있으면 나라별로 한 가정에서 소유하고 소비하는 물건과 섭취하는 음식의 양과 식재료가 자연스럽게 비교된다.

찌그러진 냄비 몇 가지가 전부인 가정에서 23인용 최고급 소파를 가지고 있는 가정까지, 하루에 적게는 800㎉에서 많게는 1만2300㎉를 섭취하는 사람까지,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문화와 일상생활 그리고 한정된 자원의 고갈과 편중된 소비구조의 문제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하루에 일정 시간의 노동만 하면서 자연 속에서 여유롭고 조화로운 삶을 살고자했던 헬렌과 스콧 니어링의 책 ‘조화로운 삶’을 읽었을 때, 그들의 삶을 배워 나의 한계 상황 안에서만이라도 실천해보고 싶었지만 여태 ‘바쁘다 바빠’를 늘 입에 달고 산다. 그들처럼 땅을 일구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헬렌이 말하는 ‘천연의 재료를 최소한의 양념과 가공으로 소박한 밥상’을 준비하게 된다면 요리 시간을 줄이고 대신 쌓아두고 침만 잔뜩 흘리며 겉표지만 흘끔거리는 책과 영화들을 볼 수 있을 텐데….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고 조리해 저녁 먹고 치우다 보면 거의 짧게는 2시간, 보통 4시간, 만일 뭔가 특별요리라도 준비한다면? 흠~! 물론 먹는 즐거움! 그걸 포기하기가 쉽진 않다.

3년여전, 프랑스 방송국에서 제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다큐멘터리로 만들 때 함께 코디네이터로 참여하며 제주의 곳곳을 방문해 제주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을 소개한 적이 있다. 방송이 된 이후에도 감독은 제주 사람들이 제철에 난 재료로 최소한의 양념과 조리과정으로 즐기는 소박한 밥상이 장수와 관련이 있다는 걸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외국여행에서 필수 방문지인 재래시장이 바로 구도심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서 매일 중국인·일본인 그리고 가까이 있는 항구의 크루즈에서 내렸을 것 같은 아시아·유럽계 관광객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들이 시장 골목의 식당에서 제주인의 밥상을 종종 찾는다. 제주의 소박한 음식이 곧 건강한 사회와 육체를 보장한다고 세계에 소문이 날거란 상상을 해본다. 그런데 제주인의 밥상을 소개하는 외국어 요리책이 한 권도 없다. 영어로 된 요리책이 있다면 제주의 소박한 밥상에 관심을 갖는 프랑스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당장 보내줄 수 있으련만….

소박한 제주 밥상이 건강식으로 알려지려면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건강한 땅에서 맑은 제주의 물과 공기를 듬뿍 들여 마시고 자란 식재료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조상이 남겨준 문화유산을 잘 보존해 관광산업의 혜택을 누리는 유럽처럼 우리 제주는 아름다운 자연과 독특한 민속 문화를 잘 보존하고 소개하여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를 부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를 살리는 건 군비 확장도, 도시 개발도 아니다. 그걸 깨닫고 실천할 정치지도자가 당선되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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