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직 <문학평론가>

수업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는데, 어느 20대 여성이 슬쩍 쪽지를 건넨다. 쪽지에 적힌 글을 다 읽고서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기분이 언짢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쪽지에는 “언제는 자(者)자가 나쁘다면서요. 그러니 탈북자란 말은 삼가주시고…. ㅠㅠ. 오늘 수고하셨어요”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연인 즉 이렇다. 요즘 나는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단지에서 일주일에 한 차례씩 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주 수업이 끝나고 수강생 가운데 한 사람이 수업이 끝나자 위 내용을 적은 쪽지를 건네준 것이다. 나는 그날 수업에서 ‘좋은 말’의 효과에 대해 다양한 예를 들어 역설을 했던 터였다. 좋은 시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와 공존 그리고 무엇보다 ‘존경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강자의 시선 깔린 말들

나는 그 좋은 예로 손택수 시인이 쓴 ‘내 시의 저작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을 꼽아서 설명을 했다. 시집 「나무의 수사학」에 묶인 이 시의 1연은 이러하다. “구름 5%, 먼지 3.5%, 나무 20%, 논 10% / 강 10%, 새 5%, 바람 8%, 나비 2.55%, 먼지 1% / 돌 15%, 노을 1.99%, 낮잠 11%, 달 2% / (여기에 끼지 못한 당나귀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함) / (아차, 지렁이도 있음)” 위의 표현에서 보듯이, 시인은 자신의 시는 자본주의적 계약관계와는 거리가 먼 존재들에서 시적 상상력을 얻는다고 천명한다. 내 딴에는 시인의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좋은 시를 쓰는 대단한 ‘영업비밀’인 양 너스레를 떨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수강생이 건네준 쪽지는 겉 다르고 속 다른 내 이중적 언어사용의 태도를 꼬집은 것이 아니던가. 아마도 그 수강생은 ‘탈북자’였던 모양이다. 그날 나는 수업 중 원주민이라는 말 대신에 선주민(先主民)이라는 말을 쓰는 게 더 낫고, 에스키모라는 말보다는 이누이트라는 말이 더 낫다고 말했다. 원주민이나 에스키모라는 표현에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을 존중하려는 마음보다는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려는 강자의 시선이 깔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누이트인들은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있는 에스키모라는 말을 명예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에 담긴 관계성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 차이를 경험하는 것은 여러 요인들도 많지만 ‘말(언어)’이 중요한 요인을 차지한다. 그래서 차이를 경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단계로 나아가려면 ‘좋은 말’을 사용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예컨대, 우리는 북아메리카 인디언을 지칭할 때 원주민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고 있지만, 이 말이 ‘뉴타운 원주민’이라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쓰일 때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탈북자라는 말도 그럴 것이다. 새터민이니 북한이탈주민이니 하는 대체용어들이 쓰이고는 있지만, 그런 말들이 이해와 공존의 마음을 온전히 표현한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제주 4·3사건’의 명예회복이 정명(正名)에 있음을 오랜 세월 동안 신원운동을 해온 제주 사람들로서는 좋은 말의 의미와 효과를 누구보다 실감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지금 ‘독거초등학생’이라는 말 대신에 ‘소년소녀가장’이라는 말이 괜찮은 것 아니냐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독거초등학생’ 같은 말 자체가 우리 사회에 유통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역설하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성찰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절감하게 된다. 이번 주 수업 때 그 수강생을 만나면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겠다. 지난번 쪽지를 받고서 ‘고민’이 하나 더 늘었노라고, 우리 같이 고민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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