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세상 읽기] 강정홍 / 언론인

▲ 강정홍

이른 아침 햇살에 비친 눈 덮인 한라산이 참 아름답습니다. 아득한 먼 옛날부터 한라산은 그렇게 존재해 왔습니다. 현재 그것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나는 바로 그 영겁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는 자연의 일부로 존재합니다. 이 아름다운 고장이 내가 태어난 곳이고, 죽어 다시 돌아갈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제주의 자연’과 ‘제주사람’은 전체적 연관성을 갖습니다. 여기에서의 전체는 제주의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위에 살고 있는 동·식물을 비롯해 우리와 연관돼 있는 자연 그 자체입니다. 오름자락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도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렇듯 우리고장이 있게 한 자연적 진화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종(種)들의 사회적 연대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회적 진화 역시 자연진화가 인간적 영역으로 확장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영역적 정체성’입니다.

사람이 사회와 조화를 이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영역적 정체성’이 요구됩니다. 여기에서의 영역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단순한 지형이나 자연적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포함해, 우리 모두의 인격과 삶이 결부된 ‘공동체로서의 공간’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항상 우리가 그 공간으로부터 우리의 정체성을 도출해내는 공동체의 역사 속에 편입돼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주라는 삶의 공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키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저항합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우리의 정체성’을 이 바다와 들판과 산마루에, 우리의 생활과 문화의 내림인 공동체의 역사에 묶는 것이 지나친 낭만주의라고 흉을 볼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무가 자신의 뿌리에 대해 느끼는 감각’이야 어디 가겠습니까.

“고루하게 또 뿌리타령이냐”고 되물으면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공유된 의미를 정립하자는 것, 바로 ‘제주’의 공간에 살면서, 이 지역의 일원이 되어, 그리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제주’에 책임지는 태도를 정립하자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이야기하는 ‘뿌리’의 의미입니다. 그럴 때만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제주의 역사는 바로 나 자신이 됩니다. 더 이상 이야기한다는 것은 감정의 수다일 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은 이 ‘아름다운 제주’에서 ‘제주사람’으로 산다는 게 많이 부끄럽습니다. ‘강정해군기지’가 그렇고, 이른바 ‘세계7대자연경관’이 다 그렇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생각할수록 안타깝습니다.

부끄러움은 무력감으로 다가옵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강정의 현장’인데도, 구럼비바위의 폭파소식을 ‘초점 없는 눈’으로 티·브이를 통해 지켜보는 이 무력감을…. ‘전략기지’가 어떻고, ‘세계평화’가 어떻고, 그런 거 나는 잘 모릅니다. 다만 이 아름다운 우리고장의 자연을 ‘조각조각 파편덩어리로 날려 버리려는’ 그 파괴행위가 무조건 싫습니다. 그래서 아쉽습니다. 진작 힘을 합쳤다면, 좀 더 현명했더라면,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제주의 자연을 지키지 못하는’ 이 비겁함의 변명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세계7대자연경관’은 정말이지, 속상합니다. 비판의 목소리를 ‘흠집내기’로 매도하고, 심지어 ‘지역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인 양 윽박지르고, 그리하여 이루어 놓은 게 고작 이것입니까. 시간이 갈수록 비상식적인 일들이 터져 나와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 ‘아름다운 제주의 경관’을 욕되게 합니까. 의도된 거짓말만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진실에 어긋나면 그게 거짓말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이젠 그 어떤 말로도 ‘세계7대자연경관’의 의미를 살릴 수 없게 됐습니다. 이 마당에 누가 그것에 열광하겠습니까. 막대한 예산낭비도 그렇지만, ‘제주사람’의 순수한 열망은 또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지없이 무너진 ‘제주사람’의 자존심은? ‘제주의 자연’을 훼손한 그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에 대한 올바른 자각’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한라산이 그러하듯, 가슴 벅차게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 그걸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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