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세상 읽기] 강정홍 / 언론인

▲ 강정홍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어쩌다 “…공무원 자격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는 신문기사 한 줄에 그 해당 공직자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 활자가 마모돼 ‘자자(藉藉)를 적적(籍籍)으로’ 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언론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가히 코미디 수준이다.

옛날이야기로 말머리를 잡은 건 ‘언론의 힘’따위를 이야기하자는 게 아니다. 그건 당치 않다. 이젠 그런 거 없다. ‘힘을 쓴다’는 건 상대방이 그 위력을 느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상대방이 그걸 느끼지 않는데도 그런 게 있다고 한사코 우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허세다. 무심한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요즘은 어떤가. 단언컨대 그런 형태의 기사를 쓰는 기자도 없지만, 신문기사 한 줄에 물러나는 공직자도 더 이상 없다. 웬만한 잘못쯤은 ‘유감’ 한마디면 그냥 끝나고 만다. 그래도 좀 미안하다고 싶으면 티·브이에 나가 절을 한번 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잊어버린다. 사과든 유감이든, 그건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가슴 아픈 일이지, 돌아서면 그냥 잊어버리는 사람들에겐 분명 사치다. 거짓이다. 그 절하는 사람들의 심리기제가 바로 그런 것일 게다.

나는 그 ‘유감’이라는 말에도 유감이 있다. 그것의 사전적 의미가 무엇이든, 그 단어가 언제부터 사과의 전용용어가 됐는지, 이젠 중앙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서부터 지역의 말단까지 유행이다시피 되고 있다. 과연 그게 바람직한 일인가. 유감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초등학교 시절 동무끼리 ‘유감 있다’고 하면, 반드시 그것을 풀어야 했다. 그것을 푸는 방법은 간단하다. 방과 후 학교 뒤 백사장에서 동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판 싸움으로…. 누가 이기고 졌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화끈하게 유감을 풀고 나면 더욱 친해진다. 물론 개중에는 졸업 때까지 말 한번 섞지 않는 독한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건 그 유감을 제대로 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유감은 사과의 뜻이라기보다는,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의 시작이다. 그러나 과문(寡聞)의 탓일까. 유감을 표명한 사람이 그것을 풀기 위해 또 다른 노력을 했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스스로 자책하여 자리를 내놓으려는 시늉을 했다거나, 자책의 뜻으로 스스로 봉급을 깎아 반납했다고 하는…. 막말인가. 그러나 그 유감이 이 유감(有感)이든, 저 유감(遺憾)이든, 반드시 풀어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네거리에 돗자리를 깔고 무릎 꿇고 앉아 주민들에게 석고대죄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 생각은 발칙하다. 요즘 세상에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유감표명’과 ‘책임을 지는 것’은 별개다. 유감을 표명했다고 하여 면책되는 건 아니다. 물론 자리를 내놓으려는 시늉을 하거나, 봉급을 스스로 깎는 것 따위가 ‘책임의 본질’이 아님을 나도 모르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은 ‘맡은 바 임무’를 다하는데 있다. 역시 책임은 항상 당위의 개념을 함축한다. 그러나 그 정도의 ‘자기반성’과 ‘자기희생’ 없이 그 책임수행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권한에 내재하여 의무와 동격인 바로 그런 것….

그게 바로 ‘책임의 감정’이다. 우리의 공직자들은, 특히 지위가 높을수록 어쩐 일인지 그 지위만이 자기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그 지위 안에 들어있는 도덕적 신념과 의무 등이 그 자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게 항상 어깃장을 놓는다. 스스로 ‘자기개혁’을 한다는 것은 역시 ‘이론의 문제’일 뿐인가.

지역사회가 답답하다. 책임을 진 사람들이 진작 그 ‘책임의 감정’에 충실했더라면, 아니, 그 ‘책임의 감정’에 최소한 솔직하기만 했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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