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동섭 / 문학박사/항일기념관장

▲ 김동섭

얼었던 대동강물로 풀린다는 우수(雨水)를 보름이나 지난 경칩(驚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심한 바람과 이틀이나 계속하는 비 날씨는 여느 해 영등달처럼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듯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가지치기를 한 여린 소나무의 작은 동산을 넘나들고 그 하늘 먹구름이 가득한 시각입니다.

이처럼 동장군(冬將軍)의 기세는 더욱 옷깃을 여미게 하고 몸을 옴츠려들게 할 뿐, 겨우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신록(新綠)의 옷으로 갈아입으려는 대지의 향연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날씨는 따뜻해지고, 초목의 싹은 돋아나 나올 것이며, 동면(冬眠)을 하던 동물들이 땅속에서 깨어 꿈틀거리다가 세상의 향연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심술을 부리며 많은 눈을 내리게 했던 작년에도 봄은 왔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시기 우리 제주는 영등하르방을 위한 제의로 온 섬이 바쁩니다. 이 영등하르방은 1월 그믐에 제주 동쪽에 자리한 소섬으로 들어와 하루를 묵은 다음, 한림 한수리(翰水里) 영등본향에서 당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3일간 온 섬을 일주하고 나서 그 다음에 맞이하는 묘일(卯日) 혹은 축일(丑日)에 돌아가는 신(神)이라고 합니다. 이 신은 바다에 사는 소라, 전복 등의 씨앗을 뿌려주고 돌아간다고 하는 비바람의 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민들은 영등하르방이 들어오는 날 날씨가 좋으면 의복을 갖추지 못한 영등이, 비가 오면 우장을 입은 영등이, 눈이 오면 솜옷을 입은 영등이 온 것이라 믿고 위했다고 합니다.

특히, 2월 초하루 산지로 들어온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그날 영등 환영제를 치루고 나면 그 때부터 바다에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열 나흗날 영등이 돌아간다고 믿었던 날에는 영등 송별제를 위해 제물을 크게 차리고 종일토록 위했는데 해상에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제의가 끝이 나면 준비했던 짚배에 제물을 조금씩 나눠 담은 뒤 바다에 뛰어 강남천자국으로 뛰어 보냈던 것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이 날 영등을 보내기 전까지는 빨래를 하거나 지붕을 일거나 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바빠도 농사일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등이 있을 때 빨래를 하거나 지붕을 일면 벌레가 생길 뿐만 아니라, 농사에도 흉년이 듣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지 이 날 송별제에는 바다에서 일을 하는 어선의 선주(船主)나 어부(漁夫), 물질을 하는 잠녀(潛女), 바닷가 마을의 대표들이 전부 참여했던 것입니다.

다른 지방에서는 이 시기에 개구리의 알이 몸을 보(補)해 준다고 해 논이나 물이 고인 곳을 찾아가 개구리알을 건져 먹었다고 합니다. 농사 일이 바쁜 농촌에서는 겨우내 자란 보리의 싹을 보고 한 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치기도 했으며, 산악 지방에서는 위병을 위해 단풍나무를 베어 나오는 물을 마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흙일을 하면 1년내내 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집의 담을 쌓거나 벽을 바르면 빈대가 없어진다고 해 멀쩡한 벽이나 담도 다시 바르거나 쌓았다고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 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바람이 심했던 이 시절을 ‘영등달’이라 하여 바다에 들지도 않았고, 물가에 가지도 않았으며, 농사일도 하지 않으면서 보름 동안 한 해 삶에 대해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물론 겨우내를 보내며 움추렸던 몸가짐과 생활 자세를 언제까지 가져갈 수는 없는 것이었기에 확 털고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만 믿고 갑자기 행하는 것 보다 한 번 더 숙고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보다 원만한 삶의 자세로 생활에 임해줄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소한(小寒)과 대한(大寒), 정초를 보내면서 추위에 몸을 움츠리기도 했고 오랜 농한기를 보내면서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던 것이 우리네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인들은 날이 풀리면서 맞이하는 계절의 조급함에서 오는 알지 못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한 번 더 세월에 대해 숙고하기를 바라는 숙려(熟廬)의 시간으로 ‘영등달’을 설정하고 보름동안의 기간을 가진 듯 합니다. 이러한 때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경험과 화합을 중시했던 우리 선인들의 지혜를 모아, 우리 모두가 이 땅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오늘을 살았으면 합니다.

저작권자 © 제주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