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세상 읽기] 강정홍 / 언론인

▲ 강정홍

 정말이다. 지방자치를 효율성의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주민자치’를 제한한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특별자치’다. 제주도 행정체제의 개편 작업은 그것을 바로잡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른바 ‘특별자치’는 그 자체에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하나는 ‘태생적 퇴영의 요인’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파괴적 속성’이다. 그게 바로 일부에서 ‘한사코 특별하다’고 우기는 ‘특별함’이다.

‘태생적 퇴영의 요인’은 역설적이게도 지나친 낙관주의의 산물이다. 그건 ‘지방행정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기초로 한다. 행정계층을 단층화하고, 지방행정을 강화하면 지역개발이 손쉬울 것이라는, ‘최선의 지방정부 구성’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다. 행정계층의 단층화는 또 다른 권력의 집중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독선과 독주를 부른다. ‘최선의 지방정부 구성’도 그렇다. 그것이 가능한 것 이상으로 ‘최악의 지방정부’가 구성될 수 있다. 그건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다. 툭하면 ‘지사의 능력’이 도마 위에 오르고, 그럴 때마다 ‘제왕적 지사’라는 말이 오가는 것도 바로 그 역사적 교훈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 파괴적 속성’은 회의(懷疑)의 산물이다. 그건 일부 기초의회의 눈꼴사나운 행태에 실망한, 기초자치단체에 대한 지나친 비관주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지방자치는 변함없이 ‘풀뿌리 민주주의’다. 우리는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아예 시군의 자치권을 무참하게 거세해버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건 잘못이다. ‘더러운 목욕물을 던지면서 아이까지 던져버린’ 꼴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슴치는 ‘특별자치’의 한계다.

어떤 제도개선도 그 지역사회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조건에 제약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현실에 대한 반동’이다. 그만큼 새로운 설계에 의한 ‘새로운 현실의 형성’도 중요하다. 거기에 우리의 방향이 있다. 물론 행정체제가 지나치게 그 지역사회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조건에 구애될 때는 그 제도는 이상(理想)과 미래를 망각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건 고식적이다. 그러나 그 지역사회의 현실을 무시한 정치적 설계가 지나치게 강조될 때는 그 제도는 미래의 실효성을 상실하고, 별개의 의미와 기능으로 전락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최악의 지방정부’ ‘제왕적 지사’ 등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지방자치 행정개편을 오로지 지역개발과 등치시켜 진행하는 것은 가당찮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참여의 원리에 의한 주민자치의 확대’를 위주로 해야 한다. ‘참여’는 단순히 ‘공적인 합의를 제공’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주민자치이고,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면, 자유로운 사람들을 산출하는 사회정치적인 산실이어야 한다.

맞다. ‘자기조직권’이 없는 ‘참여’는 무의미하다. 대표자를 뽑고, 그리하여 자치단체를 구성하는 ‘자기조직권’을 박탈하고 ‘참여자치’를 논할 수 없다. 기초자치단체 문제도 그런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대표자를 뽑는 ‘주민의 투표권’을 바탕으로 한 자치권과 자율권을 거세하면서 지역사회 내부에서만 자율권과 자발적 참여를 권장하는 것은 상호모순이다. 아직도 이런말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남루한 일인가. 인구 30만명이 넘는 제주시가, 그에 버금하는 서귀포시가 자치권이 없다는 것은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 서너 안이 거론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 지역사회가 또다시 ‘어설픈 이론’의 실험장이 될 수 없다. 새로운 제도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활발하게 제기하는 것도 좋지만,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론은 현실과 맞부딪칠 때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른바 ‘특별자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는 것도 그래서 필요하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결정한다. 그러나 ‘자기 결정권’이라는 의미만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아직도 ‘주민이하’인지 모른다. 우리의 사고(思考), 윤리적 판단, 그리고 합리적 잠재능력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것을 거의 성취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첫 번째 결정이 잘못됐다고 하여 두 번째 ‘자기선택’이 잘못되리란 법은 없다. 우리는 그걸 믿어야 한다. 그래서 ‘참여자치’를 성취하기 위해 더욱 치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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