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현돈 /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 김현돈

누구는 여유가 있어야 여행을 간다고 하지만 오히려 여유를 갖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우리는 보통 바쁘다, 여유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늘 일상은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의 그물망 속으로, 번다한 업무와 갖가지 의무 속으로 우리를 옭아맨다.

그래서 정주한 삶의 조건으로부터 잠시 떠나 잊었던 나와 대면하는 여유는 더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한 한 방편이다. 떠나야 내가 선 일상의 자리가 온전하게 드러난다. 섬을 떠나야 비로소 섬이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떠남은 더 없이 필요하다. 정주한 곳에서는 나와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심리적·미적 거리가 생기지 않는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문화·낯선 환경을 접하는 데서 오는 약간의 긴장감과 호기심이 항상 여정을 설레게 한다.

오스트리아는 우리나라보다 약간 작은 면적에 전체 인구 약 820만 명 가운데 155만 명이 수도 빈에 살고 있다. 4000만의 인구의 절반가량이 수도권에서 복닥거리며 차량 홍수에 희뿌연 매연이 가실 날 없는 서울에 비한다면, 낮은 인구밀도에 편리하고 합리적인 대중교통 체계로 교통정체를 모르는, 그래서 늘 정갈하고 쾌적한 가로의 모습에서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존재가 의식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그런 탓인지 슬로 라이프가 체질화된 이곳 사람들의 느긋한 삶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기형적인 도시 발달로 우리의 수도 서울은 이미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의 기능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지금 내가 사는 제주는 어떠한가. 인구 55만에 25만 7000대의 등록 차량으로 가구당 전국 1위(도로율 역시 전국 1위)의 차량 보유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불필요한 도로 건설과 불합리한 교통정책(교통정책이란 게 있기나 한가?)으로, 아름다운 슬로 시티가 돼야 할 섬이 가장 바쁘고 빨리 가는 도시로 변해버렸다.

동서 유럽의 요충지에 자리한 오스트리아는 그 지정학적 조건으로 유럽대륙의 역사적 격랑을 늘 한 몸에 받고 살았다. 10세기 말 바벤베르크 왕가가 집권하고, 13세기에 이르러 합스부르크 왕가의 중심지가 돼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면서 강력한 절대주의 체제를 확립해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의 맹주로 우뚝 섰다. 1867년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결성해 지금의 동부유럽과 구 소련의 일부 지역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하면서 650년을 이어오던 찬란한 합스부르크의 영광은 종막을 고하고, 1938년 나치 독일에 합병돼 2차 세계대전에서도 패전국이 되면서 미·영·불·소 4개국의 분할통치를 받다 1955년 오스트리아 협정으로 주권을 회복해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빈 우노 시티에는 IAEA(국제원자력위원회)등 국제연합 지부들이 모여 있다. 이 일대는 포스트모던한 첨단 건물들이 군집을 이뤄 구 시가지 링스트라세에 산재한 수백 년의 고색창연한 성당 건축물들과 좋은 대비를 연출하고 있었다. 땅거미가 내린 우노시티는 주변 건물들이 뿜어내는 휘황한 LED 조명 속에 잠겨 있었다.

뉴욕의 유엔 본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유엔 청사 앞 텅 빈 광장에 서서 머언 동아시아의 이방인은 돌아가야 할 그 섬을 생각했다. 근세사에 이르기까지 절대왕가의 위엄과 자존을 부여안고, 터키와 프랑스 등 이민족의 침략을 겪으며 전쟁으로 해가 뜨고 날이 저문 영욕의 세월 속에서 그 역사의 교훈을 뼛속 깊이 되새겨 후세들에게 물려줄 항구적인 평화의 반석을 놓은 그네들이 아닌가.

과거를 망각하면 미래가 없다고 했다. 그들은 과거사에 대한 엄정한 성찰을 통해 문화 대국으로서의 국격을 높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역사에서 답을 못 찾고, 시대착오적인 냉전시대의 미망에 사로잡혀 주변국들의 군사적 긴장을 유발할 군비확충에 혈안이 돼 있다. 남북이 연합해 영세중립국을 선언할 그런 날은 과연 이룰 수 없는 꿈일까. 우선 제주도만이라도 동북아의 비무장 지대로 선언해 이 지역의 평화 전진기지가 되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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