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혜경/ 아트스페이스C대표

▲ 안혜경

며칠 전, 독일서 활동하고 있는 네덜란드 출신의 작가 루드비엔 반 드 벤을 제주에서 만났다. 이 작가는 ‘유럽과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는 정치와 종교적 상황에 대해 기자적 방식으로 조사하고 주로 사진 작업으로 발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도사진과는 달리 그 사진을 통해 감상자가 현대사와 뉴스, 현실과 재현 그리고 이미지와 언어 사이의 그 어떤 부분을 각자의 시선으로 느낄 수 있도록 아주 신중하게 설치된 대형 사진 설치 작업으로 발표’한다.

작가가 2007년 카셀 도큐멘타 12에 설치했던 작업 ‘표현의 자유’의 자료화면을 막 이사해 아직 풀어내야 할 책 짐들이 가득한 내 사무실 컴퓨터에서 보여주었다. 이 작가는 자신이 포착한 수많은 사연들 중 선택한 대형 이미지 사진들을 100일의 전시기간 동안 전시장 벽면들에 붙여졌다가 흰 페인트로 지워내고 다시 그 위로 또 다른 사진 작품을 덧붙여 나가는 과정의 전시설치를 했는데, 그 각각의 대형 사진 이미지가 불러내는 의미와 사진이 지워지며 겹쳐지는 의미가 연속된 역사의 축적으로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 중엔 알제리 독립 운동 중 벽면에 ‘알제리에 평화를’이라고 조악하게 쓴 그라피티가 남아 있는 건물사진이 있었다. 알제리 독립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그 글씨가 지워지거나 가려지지 않도록 그 낡은 건물이 잘 보존돼 결국 유명 미술전시에 소개돼 역사의 흔적으로 되살아나 전 세계인들에게 공유됐다. 그 사진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전체 작품의 맥락 속에서 뿐만 아니라 흔적이 불러다주는 기억의 강렬한 재생능력을 요즘 매일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영하던 전시공간을 중앙로 건물로 옮기게 됐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3때까지 살았으니 지은 지 벌써 40년이 된 낡은 건물이다. 전시공간을 옮겨 다시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건만 부모님이 그 건물을 선뜻 내주신 덕분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전시공간의 목숨을 가까스로 부지할 수 있게 됐다.

신시가지 번듯하게 잘 만들어 놓았던 공간을 포기하고 꼬질꼬질 옛 건물로 찾아들며 비애감도 생길 법 하건만 난 요즘 참 즐겁다. 어릴적 11년간 살았던 그 공간 곳곳을 나의 물건들과 6년간 진행했던 행사들 자료들로 채워가며 옛 기억을 불러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를 세워두고 건물로 향해 걸어가며 내 시선이 닿는 곳곳에서 시시 때때로 옛 추억들을 건져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남아 있는 건물을 만나면 그 앞에서 까치발로 안을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아주 폭 좁은 옛 골목에선 예쁘단 탄성이 터진다.

태어나 초등학교1학년 때 까지 할머니와 안·밖거리로 함께 살았던 집은 넓혀진 길과 낯선 건물로 흔적도 없이 지워졌지만 주변에 남은 옛 건물들로 그 위치를 짐작해본다. 그러면 마당 한 가운데 대형 우산 모형으로 자라났던 나무 아래서 손톱에 새까만 때가 사라질 날 없이 매일 풀과 꽃들 잘라다 친구들과 모여 소꿉장난도 하고 공기놀이, 고무줄 놀이에 새끼줄 묶어 그네도 탔던 그 시절의 장면이 흐릿한 흑백영화처럼 눈앞에서 펼쳐진다.

이젠 창고 용도로 쓰이는 듯 낡아빠진 옛 현대극장 건물을 지나면, 엄한 엄마의 눈을 피해 몰래 영화를 보고 나서 혼날까 걱정하며 중앙로 집 대신 근처에 있는 할머니집으로가 할머니와 함께 있었단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며 가슴 두근대던 그 느낌이 생생히 살아난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로얄온타리오뮤지엄에 갔다가 도시 안내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박물관에 비치된 안내 브로셔에 그려진 지도를 따라 가까운 장소에 시간 맞춰 찾아가면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거리를 걸으며 오래된 건물들의 건축 디자인과 그 곳의 사연 등 그 도시의 역사를 정감있게 들을 수 있다. 장소와 건물에 얽힌 시시콜콜한 작은 역사들이 안내자의 말로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고 그 물이 하천을 이루면 지금의 토론토 시를 만들어나간 역사의 굵은 물줄기가 된다.

구 도심지 살리기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예술인들이 하나씩 중앙로로, 한짓골로 찾아들고 있다. 옛 제대병원도 새로운 활용방안을 마련해 나간다는 소식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곳곳에 스민 작은 이야기들… 졸졸 흘러 제주를 만들어나간 역사의 하천을 되살릴 수 있도록 오랜 흔적들이 잘 보존될 수 있기를!  

저작권자 © 제주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