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세상 읽기] 강정홍 / 언론인

▲ 강정홍

오름이 탄다. 새별오름이… 들불축제의 그 불꽃이 아름답다. 왜 불을 ‘꽃’이라 했는지 알 만하다. 아름다운 게 어디 불꽃뿐이랴. 무사안녕을 위해 두 손 모은 사람들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

불꽃은 모든 걸 태운다.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 불꽃에 ‘사라져 가는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발칙하다. 하물며 축제의 불꽃인데…주제넘는 이야기를 하다간 다친다. 요즘 그런 세상이다. 정녕 비판의 자유로운 시각은 이 시대의 환상인가.

사람들은 횃불을 보고 달려간다. 횃불은 위험하다.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러 달리다간 손을 데는 화를 입는다.(…執炬逆風而行 必有燒手之患) <42장경>의 말씀이다. 물론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이 경우에도 역시 유효하다. 누군가는 거기에 이렇게 토를 달았다. “왜 인간은 매번 뜨거운 맛을 보고 나서야 황폐해진 심신을 거두는 것일까” 역시 순리를 어기면 화가 미친다.

‘아름다움을 의식한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미추(美醜)를 판단하는 ‘문제의식’이다. 문제의식이란 다른 게 아니다. ‘당연하게 보이는 모든 것’에서 허위의식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다.

들불축제가 과연 우리의 ‘전통의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안타깝게도 그걸 꿰뚫어 볼 능력도 없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역사와 전통은 미래의 인간을 키우는 비옥한 땅’이라는 사실뿐이다. 역시 우리의 삶은 전통적으로 형성된다.

인간의 삶과 자기 정체성을 형성되는데 있어 역사와 전통이 갖는 선험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역사적 존재다. 그것은 필연이다. ‘한 조각 숙명’이다. 그걸 어찌 ‘선천적인 백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개발바람이 밀어 닥치고 외부의 문물이 하루가 다르게 들어온다고 해도 우리의 생활과 문화의 내림에 겹쳐 있는 전통의 끈질김을 어찌 할 수 없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태양과 하늘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것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은 항상 전통으로부터 우리의 정통성을 도출해내는 역사 속에 편입돼 있다. 나는 과거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저항한다. 역사적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은 일치한다. 우리 모두는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간에 전통의 담지자다. 전통은 우리가 존립하는 뿌리이며, 벗어날 수 없는 한계다. 일상을 산다는 것은 바로 전통을 사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하여 ‘과거의 껍데기’에 안주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과잉은 자칫 우리의 현실을 과거 속에 매몰시킬 우려가 있다. 영속적이고 고정된 어떤 특질에 집착하는 지역문화는 그 지역이 화석처럼 굳어 있다는 증거다. 뱀이 성장하기 위해 그때그때 허물을 벗듯이, 인간도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성장을 멈춘 인간이다. 세상은 저만치 흘러가고 있는데, 그 흐름을 외면하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을 위해서도 ‘역사와 전통’은 계속 이야기돼야 한다. 전통을 일상의 삶에 동화하는 깊이가 바로 미래를 여는 근본적인 자원이기 때문이다. 변화의 영속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이론적인 노력이 그래서 필요하다. 그건 충성과 사랑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곳을 되돌아보고 존경하는 자에게 속한다.

개발 가운데서도 지역사회 스스로 전통을 지키는 보존력이 있다고 본다면, 그건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다. 개발과 관련될 때, 사회는 어떤 형태로든 비용과 이익에 관한 명시적 함축적 결과만을 추구한다. 그때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건 합리적인 지식을 좀 안다고 하여 그 잣대로 전통의 비합리적인 면까지 재단하려고 하는 그 오만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머릿속 한계다.

그 머릿속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오름 하나를 다 태운다고 해도 전통은 그저 ‘뿌리가 말라버린 고목 같은 흔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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