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현돈 /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 김현돈

정초에 보름간의 일정으로 오스트리아 빈을 다녀왔다. 성긴 눈발이 흩날리던 추운 제주공항을 뒤로 하고, 인천에서 두바이를 경유하는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의 에어버스로 16시간의 비행 끝에 당도한 빈의 겨울 날씨는 제주보다 오히려 포근했다. 겨울엔 어른 키만한 고드름이 얼더라는 동행한 지인의 말을 믿고 준비해 간 오리털 방한복이 거추장스러울 지경이었다. 여정 마지막 날 약간의 눈이 내렸을 뿐 내내 날씨는 영하의 체감온도를 느낄 수 없었다. 현지 사람들도 기후변화가 아닌가 의아해 했다.

여행 계획은 수업시간 도중에 즉흥적인 발상으로 성사됐다. 지난 2학기 대학원 미학세미나의 주제는 바로크와 고전주의였다. 르네상스를 계승해 17세기 이탈리아 로마에서 발원한 바로크가 유럽 전역에 전파된 역사적 배경과 고전주의와 대비된 미학적 특징을 다루면서 수강자들 사이에서 문헌 중심의 검토는 공허하니 직접 현장을 한 번 답사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얘기가 나왔고 즉석에서 의기가 투합했다. 마침 빈에 음악 유학을 하고 있는 자녀를 둔 만학도 수강생이 있어 중부여럽의 거점인 오스트리아 빈을 여정의 중심지로 택했다. 동료 교수 한 명이 합류해 3명의 단촐한 답사 팀이 꾸려졌다.

빈 음악대학과 미술대학에 유학중인 현지 코디네이터들의 안내로 우리는 첫날부터 빡빡한 답사일정을 소화했다. 빈은 베토벤·모차르트·요한 슈트라우스·슈베르트 등 서양음악사에 길이 남을 음악가들을 낳은 음악의 도시요, 미술사에선 쿠스타프 클림크·에곤 실레·코코슈카 등 19세기 빈 분리파의 활동무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음악관·미술관이란 인상이 짙게 풍긴다. 연중무휴 크고 작은 음악홀·오페라하우스·미술관에서 음악회·오페라·미술전시가 열린다. 빈 필하모닉의 본거지로 알려진 무직페어라인에서 신년음악회를 감상했다. 2000명 이상을 수용하고, 세계 최상의 음향을 자랑하는 대연주홀에서 오케스트라가 뿜어내는 음악의 웅장한 깊이와 섬세한 아름다움, 롯시니의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소프라노의 풍부하며 청아한 음색에 매료됐다. 재치 있고 유머스러한 지휘자도 퍽 인상적이었다.

벨베데레 궁전에선 마침 쿠스타프 클림트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궁전은 18세기 초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빈을 구한 오이겐 공의 여름 별궁이었으나 지금은 미술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세기말 보수적인 주류 미술에 반기를 들고 사실적인 묘사와 추상화된 장식을 결합시킨 빈 분리파의 선구자 클림트는 비너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화가로서 그의 그림은 스카프와 넥타이, 우산, 도자기 등 많은 아트 상품의 디자인에 활용되고 있다. 빈 시내 곳곳의 사설 갤러리에서도 클림트의 원본 드로잉과 소품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그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키스’와 ‘유디트’를 비롯해 풍경화와 드로잉 등 시대별로 그의 전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빈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광경은 중세말에서 근대를 거쳐 19세기까지 6세기 이상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건축물과 편리한 도시 대중교통이었다.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바로크 양식의 성당은 파사드(정면부)와 내부에서 장엄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뤘다. 반종교개혁의 미학적 이상을 구현한 바로크 성당의 높은 돔 천장과 스탠드글라스에서 회중석으로 떨어지는 오묘한 빛의 파동은 무신론자인 나에게도 불가해한 신적 영성을 느끼기 했다. 수백 년의 때가 묻은 돌길의 중세풍 골목을 걷다보면 어디선가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튀어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트램과 버스, 지하철, 기차로 이루어진 대중교통 수단은 매우 체계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시내에선 승용차 이용객이 적어 도로는 한산하고 쾌적하다. 요금도 저렴해 10유로(2만원 가량)면 일주일 동안 시내 전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 부러웠다. 우리는 왜 안 될까 생각하니 한편으론 화도 났다. 한국, 특히 제주도의 정책 담당자들이 보고 배워야 할 대목이다. 머언 여정에서도 간간이 동료교수의 휴대폰에선 강정 해군기지의 소식이 문자로 들어왔다. 해 저문 도나우 강변에 앉아 착잡한 마음으로 강정 구럼비 바다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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