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혜경 / 아트스페이스 C 대표

▲ 안혜경

첫 눈에 반하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만날수록 매력적인 사람도 있다. 영화 역시도 보는 그 순간의 흥미로움 보다 보고 나서 오랫동안 그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장면 장면이 기억을 떠나지 못하고 잔상으로 남아있거나 배우의 역할과 대사, 그리고 줄거리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과 관련된 고민과 뒤섞이며 대답을 주기도 한다.

핀란드 하층 노동자 출신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최근 작 <르 아브르>. 이주민 등 소외계층에 대한 감독의 온기가 이 영화에서 자연스럽게 발산된다. 한때는 글도 썼던 파리의 보헤미안이었음을 자부하는 은발의 구두닦이 마르셀은 빵 값 외상 독촉을 받을 만큼 가난하다. 항구의 선착장에서 자신의 일용할 점심인 소박한 샌드위치를 먹으려던 순간, 그는 런던의 엄마에게 가려고 경찰을 피해 선착장 밑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가슴까지 담근 채 숨어있는 흑인 밀입국 소년 이드리사를 우연히 만나며 ‘어떤 책임’을 스스로 떠안는다.

마르셀이 사는 가난한 동네의 이웃들과 그의 개까지도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를 도와 이드리사를 경찰의 추적에서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심지어 이 소년을 찾아내야 할 책임을 진 경찰마저도 이 소년의 도피를 돕는다. 이 영화를 만들어가는 감독의 영상미학적 접근 방식도 흥미롭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지만, 등장인물들의 따뜻한 사회적 ‘책임’에 공감을 끌어 모으는 감독의 의도에 나의 관심이 모아졌다. 마르셀은 이드리사를 무사히 엄마에게 보내주기 위해 필요한 돈을 모금하는 방법으로 역시 은발인 왕년의 밴드를 섭외한다. 가난한 동네 사람들, 밴드와 그 공연을 찾은 청중들은 이드리사를 엄마 품으로 보내는 계획에 기꺼이 동참한다.

사회적 제도가 미치지 못하거나 정치적 의도로 외면당하는 우리 사회의 그늘에 대해 예술가는 창작 과정에서부터 공유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 ‘사회적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다. 구체적인 예는 이 지면을 채우고도 넘치도록 많다. 그 무서운 금기의 제주 4·3이 침묵의 억압을 뚫고 세상의 빛을 쬐며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순이 삼촌’ 으로 시작된 현기영의 소설과 강요배의 4·3연작 역사화 ‘동백꽃 지다’ 그리고 지난 18년간의 탐라미술입협회 회원들의 4·3전 등 수많은 작가들이 글과 시각 예술 등으로 그 사회적 책임을 스스로 떠안음으로써 가능했다.

이제 4·3은 제주도 출신 작가들뿐만 아니라 덴마크작가의 영상작업으로도 유럽에 소개됐고 제주에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머물며 4·3 작품을 창작한 도외 출신 작가에 의해서도 서울서 발표됐다. 미국 작가 마리오 우리베(Mario Uribe)의 초대전을 기획했을 때, 그는 제주 4·3을 겪은 도민들을 위한 치유의 젠 브러쉬(Zen Brush)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전시에 앞선 두 차례의 제주 방문을 통해 제주 4·3에 대해 알게 돼 관심을 가지게 됐다. 어려서부터 동양 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가정환경과 멕시코와 미국의 접경지에서 나고 자라며, 미국이 전 세계에서 벌이는 제국주의적 힘의 충돌과 점령에 대한 민감해진 정치적 촉수와 예술가적 관심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결과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로사시에 있는 소노마카운티 뮤지엄이 4·3미술을 초대해 전시할 계획이다. ‘마리오 우리베’가 지난 4년 여간 포기하지 않고 이 전시를 그 곳 미술관에 소개하기 위해 노력해온 결과이다. 그는 무고한 제주도민이 겪었던 4·3의 어처구니없는 고통을, 그리고 자국 정부인 미국이 그 가해의 중심에 있었음을 미술 전시로 알리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안으려 노력해왔다. 은발의 그가 소노마카운티 뮤지엄 관장 ‘다이안 에반스(Diane Evans)’와 이달 말 4·3 미술전 준비를 위해 제주를 방문한다. 그의 네 번째 제주 방문이다.

<르 아부르>의 마르셀이 자선공연으로 소년을 도울 수 있었던 건, 동네 주민들이 함께 내밀어준 손과 공연을 찾은 청중들의 도움의 열기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초월한 경찰의 따뜻한 인간애 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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