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현창희 / ETRI 사업화본부장

▲ 현창희

인간 역사에 있어 과학기술은 문명의 태동과 발전이라는 궤적을 같이 그려나가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선진적으로 과학기술의 진보를 이룬 국가들은 문명의 이기를 무기로 전환함으로써 수많은 식민지 개척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국지적 또는 국제적으로 발생하는 분쟁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에 기반한 강력한 무기체계 획득시스템이 유일한 해결책인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물리적 전쟁에 따른 막대한 피해를 회피하기 위해 진보된 경제시스템과 교육시스템 등을 통한 국가내 각종 활동의 작동기능 및 부의 축적 정도, 부의 활용능력 등으로 무력을 대체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의 효율적 활용 정도도 근본적으로는 보유하고 있는 과학기술력의 정도에 따라 좌우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국의 과학기술 지배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노력은 더욱 격심해지는 글로벌 경쟁환경에서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노력은 흔히 미래에 대한 통찰력과 강력한 리더십을 갖는 지도자들에 의해 강력히 추진돼 왔으며, 혁신적 성과의 구현으로 국가성장을 견인한 경우들이 있다. 우리의 경우 조선 세종대에 앙부일구, 혼천의 등 제왕의 학문에 속했던 천문학 분야에서의 성과가 있었고, 정조대에는 정약용이라는 뛰어난 실용주의자를 배출함으로써 기중기를 개발해 화성축조에 사용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과학기술은 뿌리 깊은 유교중심적 가치관에 의해 상대적으로 천시됨으로써 과학기술에 기반해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사의 발전 흐름에 편승하는데 실패했다. 구미와 주변의 열강들이 호시탐탐 국가경영권 자체를 노리는 불안정한 정치상황도 중장기적 혜안을 갖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을 어렵게 했을 것이다.

현대에는 ‘보릿고개의 절망’을 끊고자 과학기술 진흥으로 퀀텀 점프(Quantum Jump)를 통해 국가발전을 도모하려는 노력이 시작됐고, 1966년 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됐다. 이후 과학기술연구소는 시대 선도적 분야에 대한 새로운 연구소 설립의 모태가 됐고,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켜 정부부처별로 독자적 연구소 설립을 유인하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그 결과 현재는 규모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 정부부처가 각각 관련 연구기관을 보유하는 형태로 성장했다. 이는 비단 양적 측면의 확대만이 아니라 우리의 염원이었던 ‘보릿고개와의 단절’을 넘어 과학기술 자립을 위한 현재와 같은 국가연구개발체제를 정립함으로써 선진국 대열로의 합류를 위한 기반을 닦는 질적 성과도 이뤄내게 됐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우리의 대표 기업들의 성장을 이룬 변곡점은 결국 국가연구개발체제의 정비에 의한 과학기술진흥에 기반하며, 탄탄한 과학기술력을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음이 이를 입증한다. 과학기술 입국으로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부러움을 느끼는 ‘압축성장’을 이뤄 낸 것이다.

직면하고 있는 세계 경제위기의 극복과 지속적 과학기술 지배력의 확대를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과학기술 혁신주체의 관리체제를 어떻게 정립하느냐도 연구기관의 설립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과학기술예산을 GDP의 5% 규모로 확대하려는 정책기조 하에서 약 30개에 육박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의 효율적 관리체제 정립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성장한계 국면의 돌파를 위한 퀀텀 점프를 위해 필수적 과제로 인식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이 정부의 집권과 함께 다양한 정부부처 지배하에 있던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은 산업기술연구회와 기초기술연구회로 재편됐다. 그리고, 바로 이어 30여개에 달하는 연구기관들에 대한 지배구조를 어떻게 개편할 것인가로 3년을 고민한 후 일부 연구기관을 제외하고 전체를 하나의 우산하에 묶는다는 결론하에 통합작업을 진행중이다. 이에 해당 연구기관들은 점점 더 국제적 공조가 중시되는 연구개발 환경에서 지난 30여년 동안 키워 온 브랜드 파워와 범세계적 유관기관간 네트워킹 능력을 일시에 잃게 돼 미아로 전락하지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연구기관 지배구조 개편과제는 연속적·불연속적 과학기술의 혁신 특성과 장기적 발전추세, 연구환경 및 국내외 네트워킹 관계, 연구원들의 의지와 관리기관의 관리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관리체제 개편문제는 과학적 발견을 통한 기술혁신 자체가 인내를 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관리체제 개편 자체가 과학적 발견과 기술혁신 성과로 연결된다는 믿음으로 왜곡돼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집권 원년에 이어 집권 끝 해에 다시 지배구조 개편으로 과학기술정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혼란 속에서 ‘퀀텀 점프를 통한 국가 발전’을 이루기 위한 핵심 동력으로 과학기술의 역할을 기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위기와의 단절을 위한 고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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