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세상 읽기] 강정홍 / 언론인

▲ 강정홍

국회의원이 되고픈 사람들이 연일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비후보로 등록한 사람만도 꽤 되나 봅니다. 그들 중 마지막까지 완주할 사람이 몇이나 될지 두고보면 알겠지만, 역시 우리 고장에는 여기저기 ‘인재’가 넘쳐납니다.

정치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한두 번쯤 그것에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걸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지역주민을 위하고, 오로지 그것을 위해 권력을 열망할 때, 누가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정치상황은 그리 단순치 않습니다. 여당은 여당대로 ‘개혁이다 뭐다’하며 시끄럽고, 야당은 야당대로 ‘통합이다 뭐다’하여 어수선하니, 절호의 기회인 듯싶지만, 오늘의 정치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정치상황을 바꿔보자는 모두의 열망이 마치 자신의 일인 양 마구잡이로 덤벼들다간 망신을 살 수도 있습니다. 너도나도 출마하면 도대체 ‘소는 누가 키워야 하는지’ 그게 걱정됩니다.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통신수단의 발달로 정치에 관심없던 사람들이 정치현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가히 ‘1인1매체’일 정도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영역도 그만큼 넓어졌습니다. 공적영역만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바탕으로, 개인들의 일상생활로 그 틀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의 정치’에서 ‘사회의 정치’로, ‘권력의 정치’에서 ‘형성의 정치’로 그 내용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치는 개인의 일상생활에 둥지를 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을 낳고 부화해야 합니다.

그건 ‘자기 창조적인 정치’를 의미합니다. ‘자기 창조적인 정치’는 불변적인 자연법칙으로부터 추론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일상생활에서 ‘발견’될 뿐입니다. 그만큼 현실적입니다. 거기선 어설픈 ‘지조의 정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말만 번드르르한 ‘립서비스의 정치’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오로지 지역사회를 위해서 살겠다’는, 아무도 믿지 않은 말을 늘어놓아 보았자 오히려 구차스럽기만 합니다.

말하다 보니 ‘뜬구름 잡기 식’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늘의 정치상황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막연한 것은 내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자리가 바로 국회의원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머물 곳이며, 그들의 새로운 정치철학으로 채워야 할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낡은 과제가 이미 소멸됐고, 그래서 새로운 과제가 재구성돼야 한다면, 그 새로운 과제가 무엇이며, 어떻게 정의돼야 할 것인지,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건 국회의원 출마자들의 능력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한 지역의 대표로 중앙정치판에 진출하려면 최소한 올바른 ‘지역의식’만큼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지역의식’은 역사적 환경 속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안 저절로 형성된 사고방식입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기준이 모두 거기서 나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을 ‘나’와 같이 ‘우리’로 의식한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지역의식’을 상정하지 않은 ‘지역의 대표’는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우리의 정치인들은 정치판에 진출하고 나서부터는 그 정치적 지위만이 자기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정체성 안에 들어있는 ‘지역의식’ 등이 그 자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항상 어깃장을 놓습니다. ‘지역의식’이야말로 ‘지역의 대표’로서의 올바른 정체성을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양심입니다.

지역사회는 국회의원이 되고픈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단순한 경쟁의 무대가 아닙니다. 지역주민들도 순전히 ‘어리석음’ 때문에 ‘지역의 대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유권자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 ‘지역을 위한다는 그 마음’엔 한 점의 거짓도 없어야 합니다. 앞으로의 선거판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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