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현문권 / 천주교 제주교구 신부

▲ 현문권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은 독일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백만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를 받은 전범이다. 그는 독일이 패망할 때 도망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15년간 숨어 지내다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비밀조직에 체포돼 이스라엘로 압송됐다. 그는 1961년 4월11일부터 예루살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 12월 사형판결을 받고서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재판과정을 지켜본 이들 중에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있다. 그녀는 독일 출신 유태인이며 훗설·하이데거·야스퍼스 등 철학가들에게 공부했던 철학자이며 정치 이론가로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이였다.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The New Yorker)의 위탁을 받아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참관해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를 토대로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라는 책을 발간했다.

수십만의 유태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수백만 명의 아이와 남녀를 상당한 열정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도리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재판과정에서 언제나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되풀이하고, 범죄의 내용이 수백만의 죄 없는 사람들을 살육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까지 인용하며 “명령은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저지른 일과 자신의 책임을 연결 짓지 못한 채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중년의 아이히만에게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관료주의라는 피라미드 속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희열로 삼았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대학살과정에서 그의 ‘행정적’ 참여가 양심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아이히만은 단지 ‘말하기의 무능성’‘생각의 무능성’‘판단의 무능성’ 등 세 가지 무능함을 가진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기술했다. 즉, 아이히만은 스스로의 특별한 의식없이 단지 ‘조국의 명령’이라든가 ‘게르만의 영광’ 같은 지극히 단조로운 용어의 노예가 된 사람이며, 이런 몰이해와 비판능력의 부재가 결과적으로 거대한 악의 실체였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일상생활에 묻혀, “누구나 다 이러는데” “나 하나만 반대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는 명령받은 대로 하기만 하면 돼” 등의 핑계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만둔다면, 평범하고 선량한 우리는 언제든 악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다 선하게 만들고 싶다면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며칠 전, FTA 문제로 제주농민들이 도청을 항의방문하자 제주도청 공무원들은 정문을 봉쇄하고, 경찰들은 FTA 설명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농민들을 연행했다. 정작 설명회는 공무원들로 채워지고, 지루했는지 주무시는 분들도 있었다고 한다. 5년째 계속되는 강정해군기지 문제에서 공무원들과 경찰들 그리고 해군의 부당한 행위들도 마찬가지다.

1월10일에는 대한민국에서는 한꺼번에 최고로 많은 수의 정복을 입은 수녀님 18명과 신부님, 활동가 등 모두 29명을 연행했다. 강정마을주민·수도자들·성직자들·농민들·노동자들·다음은 누구란 말인가? 공무원이나 경찰이나 군인이나 ‘단지 명령만 받았고 수행했을 뿐’이라는 말은 전범 아이히만도 한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인간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한나 아렌트의 주장이 60년이나 지났지만 지금 이곳 제주에서 성찰돼야 한다. “악은 관료주의의 피라미드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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