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동섭 / 문학박사, 제주도립미술관 운영팀장

▲ 김동섭

엄동의 설한(雪寒)을 보내고 있다. 하얗게 덮인 눈 옷 위를 바삐 오가며 찍은 꿩들의 발자욱 사이에서 짧은 겨울 낮 시간의 분주함이 전해온다. 언젠가부터 보이기 시작한 까치들도 낙엽 진 높은 가지 위를 오가며 주어온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집짓기에 바빠 보이는 때이기도 하다. 오늘 조금 풀리기는 했지만 흐리고 심한 바람은 연일 계속되고 있다.

“대한이 소한이 집에 놀러 왔다가 얼어 죽었다.”, “소한 얼음, 대한에 녹는다”는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소한(小寒) 추위의 매서움이 뼈 속까지 파고드는 때였지만 우리 선인들은 메주를 쓰고 장(醬)을 담으면서 싸늘한 집안에 온기를 보태었고, 다음 한 해를 준비하기에 바쁜 세밑을 보냈다고 한다.

식구 수에 따라 달랐겠지만 보통 다섯 말 정도의 콩을 삶아 매주를 쑤었다고 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반찬이었으므로 신중을 기했는데, 메주 쑤는 날도 술일(戌日)이나 집안 대주의 띠 날인 ‘본명이 드는 날’은 피했다고 한다. 많이 가리는 집안에서는 식구들의 본명일도 피했다고도 하지만, 식구가 많았을 경우에는 대주의 띠 날만은 가렸다고 한다. 특히 장(醬)을 담는 날에 유의했는데, 신불조장(申不造醬)이라고 하여 신일(申日)에 장을 담으면 장에 쓴 맛이 난다고 그날은 피했다고 한다. 집안에 바쁜 일이 있어 장 담는 길일(吉日)을 놓쳐버리게 돼도 해를 넘기지 않고 섣달 그믐날까지는 장을 담고 새해를 맞았다고 한다.

이렇게 바쁜 세밑을 보내고 나면 신구간을 맞는다. 대한(大寒) 후 3일부터 입춘(立春) 전 3일까지를 말하는데,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기간이다. 마당 안에 있는 나무를 옮기거나, 담을 고치거나, 이사를 하기 위해서는 신에게 고하고 택일을 해 실시했는데, 신구간에는 날을 보지 않고 해도 무방하다고 믿었다. 집안의 여러 곳을 관장하는 신의 허락 없이 원래의 것을 고치거나 옮기게 되면 ‘동티가 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쁜 일상에 택일을 하고 제물을 장만해 시간을 기다렸다가 제를 올리는 것은 여간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농한기 때인 이때를 기다렸다가 집안의 자잘구레한 일들을 처리해 오는 풍습이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민간에서 신구간은 묵은 해가 가고 새 해가 오기전의 기간으로 모든 신(神)이 하늘에 올라가 보고하고 신임 직을 맡아 내려오는 기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땅을 관장하는 신들이 없는 트멍(기간)에 모든 것을 하게 되면 새 신이 와서 보고 전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 내 버려두게 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처벌을 하려고 해도 근거를 찾을 수가 없어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대명천지에 말도 안 되고 황당하며 우스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이 땅을 살아온 우리 선인들이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데에는 그 만큼의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농경사회에서 노동력의 공급은 농경생산력에 직결될 만큼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한 때 집안의 자잘구레한 일들 때문에 노동력에 손실을 가져온다면 1년 농사를 통해 자급해야 할 식구들의 식량 확보는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식구들의 노동 공급으로 이뤄졌던 우리 제주의 밭농사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해 농번기 때 식량 확보를 위해 매진하고, 작물이 성장을 멈추게 되는 겨울철에 집안 일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우리 제주인의 삶을 지탱하고 유지시켜온 것이다.

이것이 우리 제주만이 갖는 고유성이다. 1년을 주기로 반복적으로 이뤄졌던 세시풍속이며 화산섬 제주의 전통문화인 것이다. 식구 중심의 노동력으로 이뤄졌던 농경에서 이웃의 존재는 참으로 컸다. 결손된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존재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던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나만이 아닌 우리라는 사회 속에서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임진(壬辰)년 한 해가 되길 바란다. 국민 모두의 역량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세계의 제주가 됐다.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이지만, 세계인이 지키고 가꾸어야 할 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화산의 폭발로 만들어진 척박한 삶의 터로 중죄인의 유배지(流配地)였지만, 세계인들이 찾고 싶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제주가 가진 청정성(淸淨性)과 고유성(固有性)은 우리 시대 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향유할 미래 가치임에 분명하다. 땅을 일구고, 바다의 밭을 캐면서 살았던 시대는 아니지만, 이 땅을 살면서 만들어 온 오랜 전통의 소중한 가치를 이어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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