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강봉수 / 제주대 윤리교육과 교수, 제주교육희망네트워크 대표

▲ 강봉수

경기와 광주에 이어 제정될 것으로 보였던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위기를 맞았다. 보수단체들로 구성된 반대진영의 목소리 때문이다. 논란의 초기부터 대표적인 보수언론들이 ‘촛불 홍위병’이니 ‘인권 포퓰리즘’을 거론했고, 한국교총을 비롯한 보수단체들도 나서 ‘시기상조’니 학교현실을 너무 모르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 지적하며 학생인권조례가 필요하다면 ‘교권신장조례’도 함께 제정해야 할 것이라 주장했다.

거두절미하고 반대진영은 체벌금지와 집회자유를 학생인권조례의 모든 것으로 몰고 갔다. 체벌금지가 학생지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게 할 것이며, 집회의 자유는 특정이념에 치우친 촛불홍위병을 낳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더해 서울학생인권조례를 두고는 동성애와 임신을 조장하는 몰지각하고 비도덕적인 처사라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교사에게 대드는 학생의 사례들이 나타나고, 최근에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으로 ‘왕따’ 문제 등 학교폭력 사태가 이슈화되면서 이 모든 것들이 마치 인권 포퓰리즘을 조장한 학생인권조례의 탓인 냥 돌리고 있다.

나는 교육문제에 관한 한 이념적 잣대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지만,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반대진영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전혀 검증된 바 없는 이념적 주장일 뿐이라 일축한다. 인권발달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들의 주장이 수긍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상대적으로 보수진영은 늘 인권의 확장을 거부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인권 신장의 역사는 사회적 약자들이 정치적 투쟁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획득해온 과정이었다. 이를테면 노예상태에 처하지 않을 권리, 여성의 동등한 정치참여권, 신체를 보전할 권리, 사상과 의사표현의 자유 등이 그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지금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권리들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처럼 학생인권도 정치적 투쟁을 통해 확보돼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인권의 확장을 요구할 통로마저 막혀있다. 그들에겐 정치참여의 권리도 없을뿐더러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교육감선거에 조차 참여할 수 없다. 그나마 그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주는 뜻있는 교사와 학부모, 그리고 시민들이 있다는 것이 다행한 일이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을 둘러싼 논란과 이슈로라도 부각될 수 있었다. 그들이 학생인권에 주목한 이유는 반대진영이 주장하는 바처럼 단순히 교권에 도전하고 촛불홍위병을 양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비인권적인 우리교육의 현실을 바꿔보자는 지극히 교육적인 접근이다.

우리기성세대들은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이뤄지는 각종의 인권 침해를 당연시 여기는 교육적 문화문법에 깊숙이 길들여져 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경험해왔고, 새로운 세대들도 불가피하게 겪어내야 될 과정이라고 당연시 여긴다. 학생들에게 오직 1등과 일류가 될 것을 종용하며 온갖 과학습과 인내만을 강요한다. 잠시라도 일탈을 꿈꾸는 학생에게는 사랑의 매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체벌도 정당화한다. 그들은 늘 미성숙하고 기성세대에게 교육받아야할 대상으로만 여겨왔지 한번도 학습의 주체로 나서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주변인이고 약자들이다.

학생들은 미래의 희망이라 하면서, 왜 우리는 정작 그들을 비인권적인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가 하는 깊은 반성이 학생인권조례에 담겨있다. 학생인권을 주장하는 이유는 인권 친화적인 교육과정의 운영과 학교생활이 이뤄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학생의 인권만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간, 학생과 학생간의 인권도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학생인권조례에는 인권의 눈으로 우리교육을 보자는 권고가 담겨 있다.

서울학생인권조례는 재의결을 거쳐 반드시 공포돼야 할 것이다. 내가 소속된 제주교육희망네트워크의 조사(2010. 11)에 의하면, 제주의 시민들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많은 관심과 찬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려 66.6%의 절대다수가 조례제정에 찬성한다. 이는 특히 제주의 교육적 상황이 다른 지역보다 더 비인권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는 학교폭력 근절대책으로 처벌을 강화하는 이른바 무관용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최선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학교현장과 교육과정을 친인권적으로 바꾸는 길만이 근본적인 대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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