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세상 읽기] 강정홍 / 언론인

▲ 강정홍 언론인

요즘 같은 세상에 ‘서로 도우며 함께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참 멋진 일입니다. 우리의 한결같은 소망도 바로 그걸 위한 기획입니다. 역시 우리는 동일한 비전을 가지고 호흡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모두 함께 산다’는 의미는 퇴색되고, 끼리끼리 작당하여 지역사회의 그나마 많지 않은 인사 예산 등 ‘공공자원의 흐름’을 더러 왜곡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혹자(或者)는 그걸 ‘지방자치의 부작용’으로 분석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필경 이른바 ‘힘 있는 자’들이 끼리끼리 ‘힘을 나눠 갖는 전략’일 뿐입니다. ‘위험스런 공생관계’입니다. 그건 대개가 음험합니다. 언뜻 보면 ‘상생’ 인듯하지만, 결국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상멸(相滅)’일 뿐입니다.

‘서로 도우며 함께 산다는 것’은 우선 ‘이타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이기적 유전자’입장에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수수께끼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많은 이론이 있나 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에겐 그것을 완벽하게 설명할 능력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얼추 세 가지 답변이 가능합니다. 우선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 어떤 인식체계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연선택이 개체들로 구성된 집단에 적응해서 결국 이타성으로 진화했다는 견해입니다. 집단자체가 바로 선택의 운반자인 셈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타성은 단지 환상일 뿐’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세 번째 견해로부터 나온 관점 중 하나가 바로 ‘공생은 타협에 의한 이득’이라는 논리입니다. 제가 가끔 인용하는 이른바 ‘팃포탯(tit-for-tat)전략’이 바로 여기서 등장합니다. 그건 이외로 간단합니다. 만일 상대방이 첫 번째 만남에서 배신을 하면 두 번째 만남에서 배신을 하고, 상대방이 협동을 하면 똑같이 협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흡혈박쥐의 협동행동이 바로 그런 전략에 가장 부합하는 생물학적 예라고 합니다. 흡혈박쥐는 며칠에 한 번씩 피를 먹지 못하면 죽고 마는데, 사냥에 성공한 박쥐는 실패한 박쥐에게 피를 나눠 줍니다. 이때 자세히 살펴보면 진작 피를 제공했던 박쥐만 나중에 피를 제공받는다는 것입니다.

비유로썬 좀 장황합니다.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만큼 음울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반드시 달라야 합니다. 흡혈박쥐의 그런 행동이 그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본질적일 수밖에 없지만, 사람에겐 ‘자기만의 이득’ 이상을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걸 믿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타성은 결코 환상일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생각하는 ‘팃포탯 전략’의 메시지입니다.

‘서로 도우며 함께 사는 아름다움’을 위해, 그리고 더 밝은 지역사회를 위해 ‘음험한 공생관계’는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이득을 따라 끼리끼리 작당하는 행태야말로 지역사회의 폐쇄성과 부패의 온상입니다.
협잡의 탯줄입니다. 그런 행태가 사라지지 않고선 지역사회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구현할 수 없습니다. 자유로움도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참다운 ‘지방자치’도 그만큼 어렵습니다. 극히 사적인, 포장 뒤에 가린, 그리고 베일에 덮인 그 구조의 허구성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발전된 지역사회일수록 내밀한 영역보다는, 공공영역이 광범위하게 성립돼 있습니다. 그것은 사적인 이익과 공적인 이익을 일관된 안목으로 볼 수 있는 명증화된 공간입니다. 그 공간을 넓혀야 합니다. 공공영역에 대한 공연한 불신과, 그런 명증화된 공간을 급기야 ‘끼리끼리’로 대체하려는 그 구조적 관성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명증화된 공간은 추상적으로만 존재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천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방행정을 책임진 사람들이 솔선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해는 그런 ‘음험한 공생관계’가 없는 더 밝은 지역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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