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강정홍/ 언론인

▲ 강정홍

또 한 해가 시작됩니다. 세월 참 빠릅니다. 2011년 새해인가 싶더니 어느새 한 해를 보내고, 다시 2012년 새해를 맞습니다. 광음(光陰)이 한 순간이라고 했으니, 요즘 같아서는 ‘손가락 튕기는 사이’도 꽤 긴 시간인 듯싶습니다.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이야 무슨 매듭이 있고, 끊김이 있겠습니까. 시간은 그저 ‘시작없는 때’로부터 흘러와서 영원한 미래를 향해 쉼 없이 흘러갈 뿐입니다. 한 해가 저물고, 또 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것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시간의 구획일 뿐입니다.

그러나 새해 첫날은 언제나 싱그럽습니다. 차라리 거룩합니다. 새로운 시간은 언제나 흘러간 시간의 축적에서 새롭게 탄생합니다. 그것은 그저 무한히 지속되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을 근거로 창조적으로 규정된 시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힘의 원천입니다.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내일의 더 나은 삶을 실천할 수 있는 희망의 영역입니다.

시간은 항상 변화를 동반합니다. 변화가 없는 곳에선 새로운 시간은 지각되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월 따라 세상도 많이 변했습니다. 사람들의 감각과 기호(嗜好)도 달라졌습니다. ‘세상길은 험준하여 언덕이 골짜기가 됐고’ 인심도 뒤바뀌어 ‘사랑이 미움’으로 변했습니다. 옛 시인은 그걸 빗대어 ‘흰 옷이 늙은 개가 되는(白衣蒼狗)세상’이라고 읊었습니다. ‘하늘 위 뜬구름이 순간 흰 옷 같더니만 잠깐 사이에 늙은 개로 변했으니’ 세상일의 변화가 그만큼 무상합니다.

그러나 미래는 현재 속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새해를 어떻게 구상하고 기획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시간은 그 주름이 달라집니다. 그 속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내일을 주름잡아 얼마든지 늘릴 수 있고, 줄일 수 있습니다.
역시 시간은 ‘자기실현의 무대’입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기능을 갖습니다. 그렇듯 새로운 시간은 항상 우리의 의지 속에 있습니다.
저는 올해도 주제넘게 ‘물음의 형식’을 갖고 출발합니다. 그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우리의 가치’에 대한 물음입니다. “과연 우리의 미래는 더 나은 삶을 실천할 수 있는 희망의 영역인가” 물음은 의구심으로 이어집니다. “새로운 삶의 방향을 잡기 위해 질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도대체 있기는 한 것인가” 그래서 또 묻습니다. “이른바 확인되지 않는 경제적 허상 때문에 우리의 삶의 의미와 내면적 가치가 어찌 포기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어휘들은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어휘들이 우리의 삶과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실속 없는 ‘화려한 구호’는 또 다른 폭력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관점’만을 선택하도록 우리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아니, 강요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는 허구적 믿음이 우리의 실존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생소한 어휘들은 우리의 전통마저 낯설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정녕 이대로 보고만 있을 것인가”

지역사회 내부에는 다양한 사회계층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갖습니다. 그 어떤 논리를 거기에 대입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이해관계가 단 하나의 입장으로 대표될 수 없습니다. ‘강정해군기지 문제’도, 이른바 ‘7대 자연경관’의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양한 사회계층을 무시한 그 획일적 사고 때문입니다.

어떤 하나의 견해에 빠지게 되면, 시계(視界)는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우리 모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급기야 색안경을 썼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합니다. 환각 속에 빠져 있는 한, 그것이 환각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이제 한 걸음 비켜서서 ‘깨어 있는 의식’으로 ‘우리의 입장’에 도사리고 있는 내부적 결함과, 그 틈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낱낱이 드러내야 합니다. 익숙한 것, 정상적인 것으로부터 일탈하지 않고서는 결코 ‘다른 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영속적이고 고정된 어떤 견해만을 오로지 하는 것은 그 지역사회가 화석처럼 굳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새해는 달라져야 합니다. 공론의 장(場)이 활성화 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지방행정부터 변해야 합니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회운영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 중심축을 ‘주민’으로 옮겨야 합니다.
주제넘지만, 정말 주제넘는 말이지만, 지역언론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주민의 정당한 외침을 ‘떼법’으로 몰아붙이고, 드디어 그것을 주장하는 주민을 ‘통합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막말이 아무렇지 않게 들리고, 이른바 ‘7대 자연경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고 하여 어쩌고 하는, 그런 행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염원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위언(危言)’의 길을 넓혀야 합니다. 그건 시험삼아 광언(狂言)으로 헤아려보려는 치기(稚氣)가 아닙니다. 농부의 농사 일이 흙에 대한 도발이 아니듯,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롭지 못한 허위의식을 드러내고,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 깃든 헛된 기대와 유혹을 이겨내고자 하는 ‘정의로운 분노’에 의한 치열한 비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는 확실한 동력입니다. 어떤 문제가 왜 문제일 수밖에 없는가를 깨닫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거나 숙고하는 데 있어 하나의 결정적인 진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한, 그것에 대한 말은 계속돼야 합니다. 말길이 막히면, 그것이 바로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제발 새해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무망한 일이 될지 모릅니다. 또 다시 문자로 세월만 소비하는 것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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