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현돈 /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

▲ 김현돈

산 아래에 첫눈이 왔다. 연구실 창밖으로 펼쳐진 아라벌은 온통 자욱한 눈보라에 휩싸였다. 지천을 뒤덮은 무채색 풍경 속으로 하나 둘 두터운 방한복을 입은 학생들이 케리어를 끌며 내려온다. 방학이 시작돼 집으로 돌아가는 기숙사생들이다. 그들이 다시 가벼운 옷차림으로 이 길을 걸어 올라올 때까지 캠퍼스는 긴 겨울의 적막으로 들어갈 것이다. 기말고사 답안지를 마주하며 이렇게 또 한 학기가 끝나고, 한 해가 저물고 있음을 실감한다.

깨알 같이 빽빽이 쓴 답안 말미에 간략한 자기소회를 밝힌 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교양과목 ‘인간과 철학’ 시간에 내가 했던 말을 상기하고 있다. 개강 때, 철학은 철학 책 속에 있지 않고, 우리들 나날의 삶 속에, 나아가 고통에 처한 이웃의 삶 속에 있으며,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출발한 철학은 이제 고난의 시대를 치유하는 현실적인 지혜가 되어야 한다고, 지금 지척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강정주민들의 고통을 생각하자고 얘기했다.

같이 수강 신청을 했던 친구는 이런 말이 너무 부담스러워 수강을 변경했는데, 두 차례 평화버스를 타고 강정에 다녀오면서 이웃의 현실에 마음을 닫고 살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실토했다. 그리고 종강 때 내가 했던, “여러분은 오늘 철학을 종강하지만 여러분의 인생에서 철학의 종강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명심하겠노라고,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 준 철학을 앞으로 더 가까이 해야겠다는 다짐도 빼놓지 않았다.

강의시간에 환경과 생태계를 얘기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얘기하면서도 나는 강정 해군기지 문제를 화두로 삼았다. 교재에 나오는 얘기에만 관심을 갖고, 줄줄 외어 ‘모범답안’(철학에 ‘모범답안’ 같은 건 없다)을 쓰려는 이른바 ‘범생’들은 이런 현실의 이야기에 심한 거부감을 보이기 일쑤다. 그래도 나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강정 현장에 한번이라도 가서 온몸으로 느껴보라고 했다. 평화버스를 타고, 또 개인적으로 그곳에 다녀온 학생들 다수가 감상문에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이랬다. “안보든 뭐든 간에 국가가 나서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한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올 한해를 통틀어 가장 여론의 주목을 받은 말은 ‘평화버스’였다. 노동자 부당 정리해고에 맞서 열 달 이상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부산 영도로 향했던 평화버스, ‘생명평화’를 기치로 제주해군기지반대 투쟁을 벌이던 강정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을 응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제주지역 곳곳에서 서귀포 강정으로 향했던 평화비행기, 평화버스의 탑승자들은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인권과 생명평화의 존엄을 짓밟는 국가폭력의 부당함에 느꺼운 마음으로 함께 손을 맞잡고 어깨를 걸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연대가 있었기에 김진숙도, 강정주민과 활동가들도 권력의 칼바람 속에서도 외로운 투쟁을 감내하며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희망버스’는 1%의 혜택 받은 귀족층만을 위하는 MB 정부의 국가경영에 염증을 느낀 우리시대 99% 국민들의 절박한 소망을 담은 새로운 저항문화였다. 희망버스는 차별과 박해 없는 새 세상을 꿈꾼 한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빚어낸 것이다. 시인의 절규는 비감한 정조로 읽는 이의 심금을 파고든다. “나도/여느 시인들처럼/꽃을,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한 잔의 진한 커피/한 잔의 맑은 녹차와 어우러지는/양장본 속 아름다운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그러나 나는 늘 거리에 서야만 했다/너희가 쓰다버린 850만 비정규직 쓰레기인간들에 대해/노래해야 하고, 일손을 빼앗긴 350만 농민의 시퍼런 절망에 대해/노래해야 한다”고 썼다. 여느 시인들처럼 꽃을, 사랑을 노래한 대신 거리에 서서 핍박 받는 이웃을 생각하며 ‘불온한’ 상상력을 펼친 대가로 시인 송경동은 영어의 몸이 됐다.

철옹성 같은 재벌권력도 희망버스에 실은 보통사람들의 피끓는 외침 앞에 백기를 들었다. 노사합의로 해고 노동자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그러나 해군기지건설 현장, 강정 바닷가는 여전히 높고 육중한 철책으로 가로막혀 겨울 시린 바람만 음산하게 떠돌고 있다. 한해를 보내며 다가오는 새해엔 부디 이 철벽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서 한바탕 신명나는 생명평화 축제의 난장을 볼 수 있기를 염원한다.

저작권자 © 제주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