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경 <아트스페이스·씨 대표>

올해로 11회를 맞는 제주여성영화제-여성이 만든 세계 여성들의 이야기-가 23일부터 사흘간 열릴 예정이다. 프로그래머로서 이미 그 영화들을 가슴 설레며 보았지만 관객들과 함께 보며 느낌을 공유할 기대로 벌써부터 안달이 난다.

40대 중반을 넘어섰으니 이미 중년의 나이. 그간 얻은 삶의 지혜를 나눌 때인 듯도 하지만, 여전히 새롭고 신비로운 것이 도처에 널려 있어서 어떤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게 된다. 그건 내가 믿어온 중요한 가치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일부 전복되는 경험들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믿고 있는 것이 내일도 믿을 만한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니 독특한 시선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있으면 꼭 보고 싶어지고 새로 소개된 책엔 무슨 내용들을 담아내고 있는지, 신문엔 누가 어떤 의견을 말하고 있는지, 재밌는 영화나 다큐가 TV에서 소개되고 있는지, 누가 어떤 전시를 하고 있고 소개되는 연극이나 음악회는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보게 된다.
 

환경이 쥐어준 현모양처의 꿈


지금은 한 여성운동단체의 이사를 맡고 있지만 고등학교때까지만 해도 나의 장래희망은 ‘현모양처’. 어머니는 용모 세련되고 자존심 강한, 그 당시로선 드문 직장여성이었는데 문화 향수와 지적 욕구가 남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별역할에 대해서는 깨지지 않는 단단한 고정 벽을 쌓아 놓고 그 안에서 열성을 다하셨고 그런 만큼 딸인 날 그 성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물론 배워두면 요긴하게 사용하게 되지만 바느질이나 식탁 차리는 법 등 오빠들이나 남동생에겐 관심조차 가지게 하지 않는 일을 어려서부터 익히게 하셨다.

놀러 나가면 해지기전까지 어김없이 집에 돌아와야 했고 심지어 대학생이 되어도 방학하는 날 바로 집으로 날아와야 했다. 친구들과의 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다. 여자는 박사가 되어도 가정 일은 완벽히 해야 한다시며. 그런 믿음과 강요가 답답했지만 그러다 어느새 그래야 하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여성영화, 누군가에겐 사고의 전환점이길


그런데, 대학2학년 때 읽은 「여성해방의 이론체계」는 성역할에 대한 굳은 믿음에 치명타를 입혔다. 왜 나는 성역할에 대해 한 번도 거꾸로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자괴감과 함께. 그건 참으로 내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졸업반 때 수강한 여성학 강의는 오랫동안 내 정신과 육체에 진하게 스며든 남녀의 성역할 고정관념을 희석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해 살아가며 서서히 자연스럽게 혹은 어쩔 수 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었다. 뭔지 풀어내지 못하는 의문들을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두면서. 그러다 전업주부 10년차에 우연히 배운 판화는 그런 나의 답답하고 어정쩡한 상태에 신선한 산소가 되어주었고 미술소통 매개자가 되려는 꿈을 갖고 도전하게 되었다. 거의 동시에 여성운동단체 이사가 되어 막 시작된 서울여성영화제를 이어 여성영화 상영회를 제주에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여성영화는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그것은 그 영화들을 보고 이해하면서 어린 소녀, 비혼·기혼여성, 전업주부, 전문직여성, 여성노동자, 가수, 배우, 미술작가, 감독, 이민 노동자, 결혼이민자, 백인·흑인·아시아 여성 그리고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너무나 다양한 여성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에 흠뻑 빠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지평이 확 넓어졌다.

올해에도 우리가 놓친 수많은 가치와 일상의 흥미로운 시선들이 담긴 영화들, 일반 상영관에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영화들이 가득 대기하고 있다. 이 기회 절대 놓치지 마시길! 육체는 비록 세월이 흐르며 노화해간다 하더라도 정신의 롤러코스트를 탈 수 있는 그 젊음은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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