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때 오디오 AS 기사로 제주에…30년된 제품 ‘살려내는’ 뿌듯함


▲ 황종훈씨.
전파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순돌이아빠’다. 20여년전 <한지붕 세가족>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전파사를 운영하던 순돌이아빠는 못고치는 물건이 없는 만물박사였다. 한국의 ‘맥가이버’로 불리기도 했다.

로봇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던 순돌이아빠 때문에 전파사 운영을 장래희망으로 꼽는 아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 전파사는 쉽게 만날 수 없는 풍경이 돼버렸다.

대기업 전자회사들은 자체 AS를 강화했고, 값싼 전자제품이 넘쳐나면서 고쳐쓰기 보다는 새로 사는 것이 더 편해져 버렸다. 그렇게 전파사는 하나둘 문을 닫아 갔다. 제주도에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전파사 밖에 남지 않았다.

제주시청 인근에서 20년째 운영되는 ‘대양전파사’도 그중 하나다. 대양전파사를 운영하는 황종훈씨(54)는 “운영이 쉽지만은 없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까지는 계속할 생각”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19살때 오디오 AS 기사로 제주에…30년된 제품 ‘살려내는’ 뿌듯함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황씨는 19살 때 제주에 첫발을 디뎠다. 당시 국내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오디오 회사의 AS 기사로 일하고 있던 중 제주시대리점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아버지가 화북에 있는 연탄공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저보다 일찍 제주도에 정착하셨어요. 어느날 아버지께서 제가 다니던 회사의 제주대리점을 방문해 제가 서울에서 AS 기사로 일한다고 얘기 하셨어요. 서울에서 내려온 기사들이 6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버리면서 골치를 썩고 있던 점장이 회사에 저를 보내달라고 요청한거죠”

일사천리로 제주행이 결정됐지만 언젠가는 서울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외지인에 대한 텃세가 제주도는 내고향이 아니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10년만에 제주도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도 올라갔다. 그러나 6개월만에 다시 제주로 내려와 정착을 결심했다.

“어린 나이에 제주도에 와서 그런지 저는 이미 제주도 사람이 돼있었죠. 복잡한 서울 풍경과 심한 공해에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얼마지나지 않아 제주도의 환경이 그리워졌죠. ‘내가 살 곳은 제주도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진짜 제주도 사람이 된 것 같아요”(웃음)

배운게 기술이라고, 전파사를 시작했다. 그러다 비디오테이프를 찾는 손님이 늘어나면서 지금 점포 자리를 얻어 비디오대여점을 차렸다. 제주도에서 5번째 였다고. 그는 스스로 양심적으로 가게를 운영했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이 성인비디오를 빌리러 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면 조용히 타일러서 돌려보냈죠. 그런데 어느날 고등학생이 담배를 피면서 들어오더니 성인비디오를 고르더군요. 한마디 했더니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나가는데 비디오대여점이 더 이상 하기 싫어졌죠”

비디오대여점을 그만둬야 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마침 가게 건너편에 중고품 상점이 생겼다. 그래서 다시 전파사로 업종을 변경하고 20년째 운영해 오고 있다. 지금은 다른 일은 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지금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스스로 재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버려야 겠다고 생각한 물건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져오는 손님들이 있어요. 멀쩡하게 고쳐놓으면 너무 좋아들 하죠. 얼마전에는 한 손님이 ‘10년전에 고쳐준 물건을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며 고마워 했어요. 그맛에 이일을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요즘은 물건을 고쳐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여름철 가장 많은 수리 의뢰가 들어오는 선풍기도 올해는 작년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고. 그는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면서 물건을 쉽게 쓰고 버리는 요즘 세태가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더 잊을 수 없는 손님이 있다.

“30년된 오디오 수리를 맡긴 손님이 있었어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가 혼수로 가져온 제품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던 거죠. 그 오디오에는 아내와 함께 음악을 들었던 추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런 손님들 때문에 황씨는 전파사를 그만두지 못한다. 하지만 전파사에서 나오는 수익은 사실상 없다고 한다. 다른 일을 겸하며 전파사의 적자를 메꾸는 실정이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봉사활동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분명 다른 장사를 하는게 타당해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점포 위치가 좋은 그의 가게에는 편의점 영업사업들이 수시로 방문해 업종변경을 권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왜 그는 전파사를 그만두지 못할까? 인터뷰를 끝낼 때쯤 한 손님은 그의 전파사를 찾았다. TV 부품을 구입하러 온 손님은 “여기 아니었으면 필요한 부품을 구하지 못할뻔 했다”고 말했다. 황씨의 얼굴이 밝아졌다.

<제주도민일보 강길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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