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직 <문학평론가>

만일 한 공장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 전원이 ‘비정규직 노동자’라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에이, 설마’, 하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혹은, 어째 좀 으스스한 상념에 빠지려는 자신의 불쾌한 상상력에 급제동을 걸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공장이 지금 이곳의 우리나라에는 ‘있다.’ 인기 경차 모닝을 만드는 동희오토라는 회사가 바로 그곳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한 이 나라에서 이 회사야말로 ‘꿈의 공장’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금 이곳에서 권리를 위한 지독한 싸움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성에 의해 추방되는 자들을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라고 규정했다. 쉽게 말해 ‘인간 쓰레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체제는 ‘질서 구축’의 이름으로, ‘경제적 진보’의 이름으로, 이른바 인간 쓰레기를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역에서 발생한 ‘과잉 인구’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지구 전역에서 찾으려고 했고 또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 먼저

그렇다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어찌할 수 없음의 상황을 알면서도 뭔가를 어찌 해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직시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 시대를 ‘기록’하고, 이 사회를 ‘증언’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즈음에 읽은 오도엽 시인의 『밥과 장미』는 우리 시대 가장 소중한 ‘기록문학’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전태일의 유서와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그런 나라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기록한 이 책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소박한 꿈과 아름다운 연대의 정신이 수놓아져 있다.

행간에는 어찌할 수 없이 패배의 기운 또한 낭자하다. 그러나 무력(powerless)한 자신의 신세를 벗어나, 무력(force)의 힘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정신은 참으로 숭고하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행복을 전할 수 있는 거잖아요”라는 어느 비정규직 보육교사의 말에 누가 항변할 수 있으랴. 물론 당장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 노동자 앞에서 오도엽 시인이 “당신의 손에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장면은 너무나 무력하므로, 너무나 감동적이다.

외면하면 이길수 없다

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현실은 밑에서 볼 때 가장 잘 보인다고 했다. 밑에서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닐까.

지난 6월말 한국작가회의가 주최한 <통찰과 연대> 포럼에 참석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말이 귀에 채 잊히지 않는다.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리는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소금꽃나무』라는 훌륭한 기록문학을 남긴 작가라는 점도 여기에 덧붙인다.

지금 이곳에서 글을 쓰고, 문학 행위를 하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독서시장에서 꽤 유의미한 가치를 내장한 책들은 이런 ‘기록문학’들이 아니었는가 싶다. 김용철 변호사가 그렇고, 김진숙?손낙구 같은 노동운동가들의 기록이 또한 그렇다. 이른바 ‘환상문학’이 결여하고 있는 현실의 ‘리얼리티’에 대한 독자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 뛰어난 기록문학들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곳의 현실을 더 깊이, 더 넓게 이해할 수 있는 겹눈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제주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