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리 해녀 고복순 할머니

▲ 평생을 해녀로 살아온 고복순 할머니
10살 때 배운 물질 74년 간 이어져

6·25전쟁 후, 두 살배기 아이를 등에 업고 강원도까지 올라가 물질(해산물 채취)을 했다는 고복순(83) 할머니. 추억하기엔 아픈 20대 꽃다운 시절 얘기는 슬프기보다 억척스러웠다.

멀미나는 배와 기차를 번갈아 탄 후 3일 만에 도착한 낯선 땅. 연고도 없는 곳에서 발품을 팔아 허름한 방한칸 얻고는 수개월 간의 삶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수소문으로 구한 동네 아주머니에게 맡겼다.

함께 온 해녀들과 물질이 시작된다. 강원의 바다는 제주와 많이 다르지만 고 할머니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래봬도 10살때부터 물질을 배워서 20대 중반 나이임에도 고수로 통하는 ‘상군’ 해녀였기 때문이다.

“물때에 상관없이 바다만 잔잔하면 뛰어들었지. 월정리(구좌읍)보다는 돈벌이가 좋았어. 쉼 없이 반년을 그리 보내곤 했지. 동네주민들은 낯선 해녀의 모습에 신기해하면서 억척스럽다 입을 모았어. 그 시절엔 다들 곯은 배 물밥으로 채우며 고생했어”

억울한 점도 많았다고 한다. 그 지역 어촌계는 이방인이 남의 바다에서 일을 한다며 채취한 해산물의 10분의 7을 가져갔다. 아이 맡기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물질이 서툰 해녀는 수개월 일하고도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고 할머니는 물질로 7남매를 키웠다. 22살 어린 나이에 시집 와보니 있는 재산이라고는 방한칸 짜리 집이 전부였다. 남의 밭 빌어서 보리·감자·고구마·마늘 등 안 해 본 농사도 없다. 새벽에 일어나 밭일 하다가 물때가 되면 물질하고 다시 밭일을 반복했다.

“요즘은 해녀복(수트)에 오리발도 있지만 그때는 면 옷 하나만 입고 추운 날에도 물질했지. 추위는 별것 아니었어. 파도만 세지 않으면 되는거야. 또 남의 밭 일궈봐야 몇 푼 안됐지만 내 새끼들 먹이고 입혀야 했으니 그렇게 살 수밖에”

마지막으로 낳은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인 1970년대 중반에 비로소 안거리와 밖거리가 있는 지금의 돌담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자식들 다 키우고 나니 그나마 마음의 짐도 내려놓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시련이 닥쳐왔다.

미역을 캐면 지게로 나르고 밭일도 함께 했던 남편이 중풍(뇌졸증)에 쓰러진 것. 당시 열악했던 도내 의료시설에 치료는 서울에 있는 병원에 맡겨야 했다. 병수발은 고 할머니의 몫이었다. 하지만 결국 완치되지 않았고 발병 4년만에 남편을 떠나보냈다.

“자식들에게 미안하지. 방한칸 집에 7남매가 모여 살면서 원 없이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 없는 형편에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잖아. 그래도 요즘은 1년에 한 번 온 가족이 모일 때 자식·손자들 다 보니 좋아”

태어나면서부터 억척같은 삶에 길들여진 탓일까. ‘생존’에 초점일 수밖에 없던 숙명에 힘겹거나 슬퍼도 고이 받아들여야 했다던 고 할머니. 위안받아야 할 기구한 운명인데도 7남매 자식 걱정에 미안한 마음만 감돌 뿐이었다.

70년 세월을 훌쩍 넘은 해녀의 삶이 지겹지도 않은지 인터뷰를 마치고 나면 천초 캐러 가야한다며 바삐 서둘렀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이 젊어서 남들이 (바다에)뛰어들면 따라가게 된다”던 고 할머니의 억척근성은 그날의 배고픔의 서러움을 잊지 못하는 탓이었다.

/한종수 기자 han@jeju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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