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전문가 오창일씨

▲ 와인 전문가 오창일씨
와인 전시·유통 및 소믈리에 교육까지 ‘척척’
스토리텔링 접목 ‘테마와인’ 1000종 만들고 파

“기분이 울쩍하다면 ‘피노누아’를 마셔봐요. 은은한 로즈마리 향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맑은 루비색은 보면 볼수록 평온해지는 듯 하답니다. 우울증에 탁월하다고 소문났죠”

오창일씨(45)는 자리에 앉자 마자 한 잔 마셔보라고 권했다. 루마니아 산 피노누아는 도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와인 중 하나라며 와인 애호가들이 특히 비가 내릴 때 많이 찾는다고 한다.

요즘같이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스파클링 와인 중 하나인 ‘독니스파’(이탈리아 산)를 권하기도 했다. ‘OO할 때 괜찮은 와인’을 묻는 즉시 오씨는 망설임 없이 척척 대답한다.

도내 유일하게 와인을 전시하고 도·소매 및 수입, 소믈리에(와인 감별사) 교육까지 모두 섭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찾았다. 그의 매장에는 100여 종이 넘는 와인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와인 매장은 “오래 못 버틴다”는 지인들의 말을 조롱이나 하듯 8년째 이어가고 있다. 당시 불모지나 다름 없던 제주에서 와인 매장을 차린 이유가 궁금해졌다. 시간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치냉장고 ‘딤채’로 유명한 위니아만도에 입사(1991년)할 때가 25살이었어요. 경영학을 전공한 탓인지 마케팅 부서에 발령받았죠. 그곳에서 수년째 딤채 기획을 담당했어요”

외부컨설팅과 사내 공모 등을 통해 지어진 ‘딤채’라는 이름 역시 오씨의 제안이 채택된 것. 이후 딤채 모델로 활약했던 탤런트 이미연씨 캐스팅도 직접 나서며 회사 성장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던 중 제주에서 아버지의 회사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죠. 6년간 정든 회사를 정리하고 제주에 내려와 회사 경영을 도와야만 했어요”

하지만 2년 후 회사의 운명은 IMF 직격탄을 맞으며 사라지고 만다. 새로운 일을 찾아 그는 서울로 갔다. 이왕이면 전공(부전공 무역학)을 살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뒤늦게 인연을 맺은 곳이 와인 수입·유통을 주사업으로 하는 무역회사다. 서른 셋에 시작한 무역업무는 그의 적성에 딱 맞았다. 자연스레 와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6년을 근무하며 와인과 함께 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고향에 내려와 와인 대중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본사와 협의를 거쳐 독립된 지사를 이곳에 만들게 됐고요”

8년간 매장을 운영하며 힘든 적이 많았다고 한다. 와인을 찾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다가 호텔 등의 기존 납품체계를 뚫기도 힘들었다. “처자식이 있었다면 벌써 그만뒀다”는 그의 말은 ‘싱글’생활이 버티는 이유라고 귀띔했다.

오씨는 “지금은 와인으로 돈 벌고 싶은 욕심보다 대중화에 기여한다는 기쁨이 크다”고 했다. 도내 모 대학 평생교육원에 개설된 소믈리에 과정에 15만원의 강의료를 받고 100만원 어치 와인을 들고 가 열정을 쏟아붓는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매장 운영이 힘에 부치지만 오씨의 꿈은 크다. 스토리텔링과 접목해 1000여 종의 ‘테마 와인’을 만드는 구상이 그것이다. ‘죽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와인’ ‘연인를 위한 와인’ ‘제주해산물에 어울리는 와인’ 등 지금까지 700여종의 테마를 만들어 놓은 상태다.

“도내에 유통되는 모든 와인은 감별할 수 있어요. 700여종까지 감별할 자신이 있고요. 기존에 있던 와인 전시·매장이 모두 문 닫으면서 제주 와인시장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죠. 이곳마저 문 닫으면 와인은 끝난다는 사명감과 대중화를 위해 헌신하고 싶어요”

그의 눈빛은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미묘한 고독함도 배여 있다. 그의 나이 27살, 신혼 한 달 만에 아내와 사별했다. 당시 바쁜 회사일로 백혈병을 앓던 그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많은 날 살아오며 가장 가슴 아픈 일이라고 한다.

우울할 때 좋다던 와인 얘기를 가장 먼저 꺼내든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까. “1만원짜리 와인이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 와인이 되듯이 와인은 결코 어려운 게 아니랍니다” 오씨가 남긴 이 말이 “넉넉치 않은 형편이지만 즐기면서 살아가니 인생 참 행복하다”는 말과 오버랩 되며 다가왔다.

잃어버린 사람을 대신해 그의 곁에 함께 있어 준 ‘와인’이 각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느 곳에서도 후원 못받는 형편이지만 오로지 사명감 하나로 6년 넘게 도민·관광객을 상대로 ‘세계 와인 페스티벌’을 열기도 한다.

와인에 들어 있는 성분이 혈관 질환, 심장병 등 성인병에 탁월하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널리 알려졌다. 건강을 챙기는 음주 문화를 제주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오씨는 지금도 특강 요청이 들어오면 언제든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한종수 기자 han@jeju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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