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립무용단 춤꾼 양지호씨

▲ 도립무용단원 양지호씨
거리투쟁, 힘 센 탄압에 힘 약한 저항
노조·비노조 단원 모두 ‘정치 희생양’

며칠 전 밤새 내린 눈은 양지호(42)씨의 가슴에 서러움만 쌓이게 했다. 매서운 칼바람은 기어코 감기를 불러오고 말았다. 제주도청 맞은편 인도에 천막을 치고 거리투쟁에 돌입한지 벌써 한 달째다.

7개월 전 해고를 통보받은 것도 서럽지만 고생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온다. 수개월간 지속된 생활고에 세 자녀는 처가에 맡겨놓은 신세다. 그의 아내도 함께 천막 앞 거리에서 ‘저항’의 몸부림을 치고 있어서다.

“결혼한지 벌써 12년 됐어요. 무용단에서 만나 서로 7년을 지켜봤죠. 일에 대한 제 열정과 책임감이 아내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는 말이 고맙더군요. 내 인생은 무용단에 있었어요. 청춘을 다 바쳤으니까요”

20여 년 전 춤에 대한 그의 열정은 도립무용단으로 발길을 옮기게 했다. 춤을 배우기 위해 넉넉지 않은 월급을 털고는 전국 유명한 춤꾼들을 찾아다녔다. 오로지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수년 후 그는 뜻 맞는 이들과 함께 더 넓은 예술세계를 갈망하며 사설무용단을 만들고 활동에 들어갔다.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공연은 매번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 자신이 몸담았던 도립무용단이 존폐 위기에 처하며 도움을 요청해 왔다.

“2001년 당시 도립무용단은 재정지원이 넉넉했는데도 공연장에 관객이 찾아오지 않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어요. 도립무용단 측에서 ‘살려달라’는 부탁이었죠. 제안을 받아들이고 온갖 노력 끝에 화려하게 부활시켰어요. 덕분에 2000년대 초중반 제2의 전성기를 누렸죠”

2006년 이후 위기가 찾아왔다. 안무가를 뽑는 과정에서 ‘정치성’이 가미된 것. 당시 지방선거 후 특정인에 의해 낙하산 안무가가 자리를 꿰찼다. 새로운 안무가는 무용단을 ‘경력쌓기’로 이용만 했다. 무자격에 무연고라는 이유로 언론·도민사회로부터 실종된 예술성·지역정체성을 공격받기도 했다.

“한때 전국 무용대회에서 입상하면서 해외 순회공연 자격을 얻었어요. 그런데 출국 1주일을 앞두고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죠. 당시 무용단을 관리하는 문화진흥본부 한 공무원이 해외공연 투어에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장지원비를 끊어버린 거죠”

무용단은 더이상 예술단체가 아니었다. 낙하산 인사, 지원금을 무기로 단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최소한의 권리와 예술활동을 위해서라도 노동조합 설립이 절실했다. 2007년 노조 탄생의 배경이다.

노조 설립 후 압박은 거세졌다고 한다. 노조를 이끈 지호씨의 이번 부당해고는 2007년에 이어 두 번째다. 도립무용단 역사상 처음으로 재계약이 거부된 것. 노조가 힘을 모아 복직을 시켰지만 또 한번의 해고에 지호씨의 한숨만 깊어질 뿐이다.

“예술은 예술일 뿐입니다. 정치성이 들어갈 이유가 없어요. 아직도 민노총(도립무용단 노조 상위 단체) 탈퇴하면 다 들어준다는 회유와 압박이 있습니다. 노조든 비노조든 단원 모두가 정치 희생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지사나 도의회 의장, 문화진흥본부 등 예술 관련 고위 공무원들에게 묻고 싶단다. 단 한번이라도 공연 연습장을 방문해 봤는지, 혼을 담아 완성한 작품을 예술 자체로만 봐 줄 수는 없는지 말이다.

엄동설한 거리 투쟁은 지호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다. 한해가 저무는 날 지호씨는 오늘도 거리에서 먹고 자며 외로운 투쟁 중이다. 점점 누렇게 변하는 천막과 달리 지호씨의 눈빛은 열정으로 여전히 빛나고 있다.

혹자는 지호씨에게 예전처럼 사설무용단 활동이 마음 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건넨다. 이에 지호씨는 ‘지원금’, ‘정치’에서 벗어나면 당연히 마음 편할 수밖에 없단다. 다만 지호씨는 “예전처럼 돌아가더라도 억울함 때문에 이번 투쟁에서 이기고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한종수 기자 han@jeju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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