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1970년대 제주 해녀의 모습이다. 물질을 하기 위해 현장 인근에 도착한 해녀 둘 가운데 한 사람은 테왁과 망사리가 들어있는 구덕 짐을 내려놓고, 다른 한 사람은 짐을 그대로 등에 진 채 한 손에는 작살(소살)을 들고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다. 해녀의 장비로는 '테왁'(부력을 이용해 해녀들이 가슴에 안고 헤엄치는 기구), '망사리'(자루
▲ 삼성혈이 탐라국의 성지로 본격 가꾸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중종 21년(1526) 이수동 목사가 섬성혈 경내에 제단과 담장을 쌓고 나무를 심으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어 영조 48년(1772)에는 양세현 목사가 바깥 담장을 쌓고 소나무를 심었으며 제전(祭田)을 마련, 건시대제(乾始大祭)를 봉행하기 시작했다. 고종 26년(1889)부터는 건시대제와
▲ 물이 귀한 제주에서는 논농사 대신 보리와 조 등의 밭농사를 주로 해 왔다. 보리 파종은 '돗거름'(돼지거름)과 부엌에서 생산한 재를 보리씨앗과 함께 뒤섞은 뒤 밭에 나가 점파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보리씨앗이 바람에 날리지 않고 보리 생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뉴월이 되어 보리가 익으면 보리를 베어 수확에
▲ 탐라 발상지인 삼성혈의 삼성사(三姓祠)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삼성혈에 처음 제단과 담장을 두르고 나무를 심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중종 21년(1526) 이수동 목사이다. 숙종 24년(1698) 유한명 목사 때는 삼을라묘가 세워졌고, 숙종 28년(1702) 이형상 목사가 사직단이 곁에 있어 삼성묘를 가락천 동쪽 서안으로 옮겼다
▲ 급증하는 제주도내 전력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 16억238만원을 투입해 제주항 동부두쪽에 제주화력발전소를 세웠다. 당시 기력(氣力)발전기 5000kw 2대를 설치했고, 1974년에 1250kw 내연발전기 6대를 더 설치했다. 제주도 전력의 주공급원이었던 이 발전소는 26년 만인 1996년에 폐쇄했다. 현재 제주도에는 제주시 삼양동의 북제주화력발
▲ 1957년 10월5일 이응준 체신부장관이 대정읍 상모리 모슬포 우체국을 시찰하고 나오는 장면이다. 이 장관은 당시 정재설 농림부장관과 함께 내도했다. 한편 1902년 8월15일 제주우체사(郵遞司)가 제주도 최초의 체신관서로 개설된 이후, 1903년 제주우편수취소로 명칭이 변경됐다가 1907년 1월1일 제주우편국으로 승격되면서 도내 우체국의 역사가 전개됐
▲ 1960년대 조와 콩 등을 장만하기 위해서는 도리깨로 작업했다. 집 마당이나 마을 공터 또는 밭에서 타작을 했었다. 집 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할 때면 타작한 곡식들이 다른 곳으로 튀어나가지 못하도록 사방으로 초석 등을 쳐놓고 타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쪽으로 마주서거나 빙 둘러서서 도리깨가 부딪치지 않게 소리를 하며 타작을 한다. 사진은 1968년 가
▲ 제주문화방송의 전신인 남양방송(약호는 NBS)은 삼도리 106번지 박태훈 사장집 3층에서 제주도내 최초의 민간 상업방송으로 1968년 9월14일 첫 전파를 발사했다. 사진은 바로 남양방송 개국 공연 장면이다. 개국 당일에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사회로 김세레나 등 인기가수와 정상급 연예인들이 출연,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제주시민회관에서 개국 축하행사
▲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도내 곳곳에서는 6월 장마를 앞두고 거둬들인 보리를 말리기 위해 집마당은 물론 동네 골목길까지 멍석을 깔고 탈곡한 보리를 널었다. 갑작스러운 비가 내릴지 몰라 전전긍긍하기도 했고, 저녁이면 입으로 바람을 불며 까끄라기를 털어내기도 했다. 보리를 말릴 만한 장소가 없으면 공터를 찾아 멀리 가기도 했는데, 제주시내 해안가 마을에
▲ 1982년 2월5일 c123 군용 수송기가 악천후로 한라산 정상 부근에 추락, 두 동강 난 모습이다. 이 사고로 수송기에 탑승했던 육군과 국군 조종사 등 장병 53명 전원이 순직했다. 국방부는 사고 다음 날인 6일 "대침투 작전 훈련 중이던 c123 수송기 1대가 악천후로 한라산 정상 부근에 추락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수송기는
▲ 1969년 어느날 한라산의 넓은 품에 오롯이 안긴 밭에서 아낙들이 김을 매고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쪼그려 앉아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는데, 꽤 큰 규모의 밭이라 작업시간이 오래 걸렸을 듯하다. 아낙들은 아마도 힘겹고 지겹게 여겨질 수 있는 김매기를 "검질 짓고 골 너른 밧듸…"하는 사대소리(검질 매는 노래)를
▲ 대한민국 공보처 제주방송국이란 현판이 걸린 이 한 장의 사진은 1950년대 초창기 건물 모습이다. 1950년 9월10일 한국전쟁기에 개국한 제주방송국은 처음 제주시 이도2동 1632번지 제주무선국 수신소 건물을 임대해 남한에서 11번째 지방 방송국으로 개국, 첫 전파를 발사했다. 당시 가청권은 제주시 중심지였고 라디오 보유대수는 200여대에 지나지 않았
▲ 좁씨를 뿌린 밭에 좁씨가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말떼와 말이 끄는 '남테'로 단단하게 밟아주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이 '다랑쉬오름'이다.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1704) 민속 '답전팔양'(踏田八陽)에 따르면, "주기에 말하기를 흙의 성질은 푸석푸석하고 메마르다. 밭을 개간하려면 반드시 소나 말을 몰고 와서 이를 밟
▲ 추자도에 가면 집집마다 플라스틱 제품의 대형 물통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섬 지역인 만큼 하천이 없고 지하수가 발달하지 않아 급수가 일상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젯거리였다. 추자 사람들은 급수 문제해결을 위해 부단히 애를 써왔다. 가뭄이 들어 저수지 물이 바닥을 보일 때 해군함정이 물을 실어오면 집집마다 대형 물통을 들고 나와 물을 받아가곤 했다.
▲ 한 소녀가 오름 자락에서 마소를 돌보고 있는 모습이다. 제주에서는 날마다 마소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순서를 정해 번을 섰다. 차례가 돌아온 가정에서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집집마다 돌며 마소를 몰아 들녘으로 나가 저물도록 마소를 먹인 후에 돌아온다. 보통은 남자들의 몫이지만 남자가 없는 집안에서는 여성도 마소를 먹이러 다녔다.
▲ 1970년대 마을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물을 실어 나르는 전경이다. 주민들이 리어카에 물을 가득 채운 드럼통을 싣고 농경지로 향하고 있다. 당시에는 도내 대부분 마을들이 용천수를 상수원으로 활용하고 있었고 지하수 개발이 일반화 되지 않아 지하수나 상수도를 이용한 농업용수 공급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가뭄이 들면 저수지나 마을
▲ 1991년 '시민학도 단결해 4.3 진상 밝혀내자!'라는 대형 현수막과 걸개그림이 걸린 채 제주대학생들이 학교에서 '4.3자주항쟁 계승 및 구국선열 추모제'를 열고 있다. 이러한 젊은 대학생들의 4.3사건에 관한 관심과 적극적 참여는 제주 사회의 4.3사건진상규명과 유가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운동에 커다란 활력소가 됐다.(김기삼 사진) '사진으
▲ 추자도, 우도, 가파도, 마라도는 물론이고 비양도 등 도내 유인도에서 주민들의 가장 큰 불편 중의 하나가 식수문제다. 비양도 역시 본도에서 식수가 공급되기 전에는 빗물을 받아 저장해 뒀다가 식수 및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본도와 비양도 사이에 송수관이 연결된 것은 1965년 10월15일이다. 제주도와 제주해역사령부의 자매결연 사업의 하나로 한림읍 협재리에
▲ 1992년 4월2일 구좌읍 다랑쉬굴에서 11구의 유골과 각종 유물들이 제주4.3연구소에 의해 44년만에 발굴됐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서 큰 충격을 던졌다. 당시 처참한 모습으로 공개된 다랑쉬굴을 보면서 사람들은 4.3사건의 참혹함과 그 진상규명의 시급성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희생자 가운데는 여자 3명과 아홉살 난 어린이도 포함된 것으로 밝
▲ 1955년 6월 최초로 금산수원 개발에 착수해 1957년부터 제주시내 일부 지역에 수돗물이 공급되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원활한 용수공급은 제주개발의 최우선 과제였다. 특히 중산간 마을에서는 여전히 봉천수에 의존해 보건위생에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1967년 4월21일 한라산의 계곡물을 막아 23만 도민에게 생활용수를 공급하기